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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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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98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 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황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목, 1999년 7월호, pp.123-124,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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