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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배론 신학교와 순교의 요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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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99

배론 신학교와 순교의 요람지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서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감옥, 즉 신학교 역할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 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이 완전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두 방이 형편없이 잘 닫히지 않는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어서 공기와 발산하는 냄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게 침투합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학생들에게 옮겨 주어서 차례차례로 앓고 있습니다(푸르티에 신부의 1865년 11월 20일자 서한 중에서).

 

게다가 주변에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옆으로 지나가는 외교인이 들을까봐 소리를 내서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존속시키고자 했으며,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얼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때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이 궁벽한 곳이었으므로 당장에 포졸들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각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피할 형편도 아니었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포졸들은 체포한 이들을 앞세우고 서울로 떠났다. 보통 배론에서 서울까지는 3일이 걸리는데 극도로 쇠약해진 푸르티에 신부가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날이 걸렸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모두 제외되고 말았다. 끝가지 신앙을 증거한 사실이나 순교 의지를 표명한 점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박해의 물결이 지나간 뒤에도 배론 교우촌은 꾸준히 그 복음의 터전을 유지하였다. 또 박해 때 피신했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공소로 설정되었고, 1920년대에는 공소 강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이곳은 가구수는 65호, 총 신자수는 100여 명이었다. 그리고 이제, 배론 성지는 순례의 명소가 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신심과 성인의 가르침, 그 안에 담긴 애환들을 전해 주게 되었다.

 

[사목, 1999년 7월호, pp.124-126,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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