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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유박해 순교자들: 정철상 가롤로 - 정약종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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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25

신유박해 순교자들 (7) 정철상 가롤로


정약종의 장남, "주문모 신부 거처 알려주면 아버지 풀어주겠다" 유혹 뿌리쳐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 금교령을 내리면서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기호까지 날로 치성해지고 있음을 거론하고, 그래도 국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역률을 적용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가작통법을 엄히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이며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는 시작되었다.

 

지난 해 연말에 최필공과 최필제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잇달아 체포되어 가더니 새해에는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최창현 회장마저 체포되는 불길한 징조를 보며, 공포심이 번져 신자들이 불안해하였는데 마침내 정월 10일(음)에 이렇게 금교령이 내려서 염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당시 명도회 회장 정약종은 이제 이런 상황을 비상상태로 보고 중요한 물건들을 은밀히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밀고를 피할 수 있도록 집회의 비밀이 더욱 잘 유지되도록 조치하고자 했다. 그는 지난 해 있었던 양근 지방의 박해를 피하여 서울에 와있던 중이었는데, 그 동안 지니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 및 주문모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있는 책궤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믿을 만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인 그의 사환 임대인 토마스를 시켜 책궤짝을 아현에 있는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다. 나무로 궤짝을 둘러싸서 나뭇짐처럼 위장하여 옮기던 중, 밀도살한 고기를 숨겨 옮기는 짐으로 오해받아 수색을 당하면서 마침내 한성부 관원에게 발각되어 임대인은 체포되고 책궤짝은 압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진 아흐레 뒤인 19일에 있은 이 정약종의 책궤짝사건으로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크게 확대될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초조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포도대장 이유경은 채제공의 외조카로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더 이상의 보고를 하지 않아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 뒤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신대현은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필공, 최필제, 최창현 임대인 등 충실한 신자들만 옥에 남겨 두었다.

 

이를 본 공서파로 소북의 박장설과 이서구, 최현중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려 신자들을 반역죄로 처벌할 것과 신자들을 석방해 준 신대현도 처벌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왕대비는 크게 노하여 포도대장 신대현을 잡아 가두게 하고 포도청에 있던 신자들은 의금부로 옮겨 반역죄를 적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을 체포하여 국문을 하였고, 2월 11일(음)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을 16일(음)에는 이기양을 차례로 체포하여 의금부에 구금하였다.

 

이 때, 구금 당해 순교한 한국초대교회의 뛰어난 지도자요,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영광스러운 순교를 한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의 장남으로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 - 1801년)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말씀과 모범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교회의 계명과 본분을 지키며 자랐다. 그는 아버지의 훌륭한 모범을 그대로 본받아 매우 빠르게 영적 성숙을 이룩하였다. 양근 땅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그로서는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온갖 명예와 부유한 생활을 모두 버리고 다만 한가지 그 생의 목표를 하느님께 두었다. 철상은 참으로 성서의 권유대로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았다.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아버지 정약종과 삼촌 약전, 약용이 모두 의금부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철상은 아버지와 삼촌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옥 근처에 머무르면서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 중 중부인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숙부인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각각 유배되었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킨 아버지 약종의 옥중 고초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키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옥중생활을 위로하며 격려했다. 철상이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하는 동안 그는 참으로 가혹한 효성의 시험을 받았다. 그것은 포졸들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신부(주문모)의 거처를 알리라는 것이었다. 포졸은 신부의 거처만 알려주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고 옥고도 면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실로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유혹의 심각한 고통을 겪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 유혹의 시련을 이겨내며 묵묵히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더욱 정성껏 했다.

 

마침내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1801년 2월 26일)의 영광을 얻자 그 날로 철상은 국청의 명에 따라 형조에 감금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형조의 옥중에서 그는 짚신을 삼아 겨우 먹을 것을 구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아버지의 뒤를 따를 것만 바랐다. 사형집행일에 그는 결연히 형장으로 나가 기쁘게 망나니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남은 가족들은 고향인 마재로 돌아왔으나 국법을 거역한 죄인의 가족으로 옹색하고 시련이 겹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 냉대와 시련 속에 우리의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요 순교성인이신 그의 동생 정하상 바오로의 어린 시절은 시작되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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