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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순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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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304

순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1. 순교로 시작하고 순교로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신앙

 

순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또는 그리스도교의 어떤 성덕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를 시작하기 위해, 또한 그리스도교의 성덕, 사랑, 용서, 인내, 희생, 자기 봉헌 등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순교자이시다. 그분께서는 최초이자 최고의 순교자, 모든 순교자의 모델, 다른 모든 순교자를 순교하게 하시는 순교자이시다. 모든 순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순교의 힘을 입어 순교했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보람과 행복을 찾아냈다.

 

예수님의 순교로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제자들과 초기 교회 신자들의 순교로 성장하였다. 열두 사도와 72명의 제자들은 거의 모두 순교했고, 초기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목숨을 바쳤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가 고문을 받고 사형 당하게 되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고 입교했으며, 교회가 나날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후 천주교가 여러 지방과 나라에 보급될 때마다 그 지방과 나라에서 반드시 박해가 일어나 역시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이 순교를 했다는 것도 오묘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또한 천주교를 믿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천주교를 믿고 입교했으며, 그 지방과 나라에서 천주교가 나날이 성장했다. 참으로 순교자가 흘린 피는 그 땅에서 천주교가 자라나기 위한 '거름' 구실을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라고 요구하셨다(마태 16,24-25; 19,29 등). 그리고 그 예수님의 요구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순교자, 성인 성녀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 포기했으며, 거기에다 자기 인생의 의미와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찾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2. 천주교 신앙의 자산은 순교

 

왜 천주교는 순교로 시작하고 순교로 성장하는가? 왜 천주교는 새로운 곳에 전파될 때마다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함으로써 자리를 잡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천주교의 신앙은 그 자체가 순교이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신앙을 사는 것은 바로 순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신앙이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순교에 응답하여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목숨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순교에 나의 순교로 응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순교가 없었다면 천주교가 시작하지 않았고, 순교자들의 순교가 없었다면 천주교가 성장하지 않았듯이, 이제 나의 순교 없이 천주교는 완성되지 못한다.

 

그것은 박해 시대에도 현재도 마찬가지다. 과연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으로 순교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이 자기 존재의 밑바닥에서 감동, 감격하여 그분께 '귀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귀의'하는 것은, 그분께 자기 자신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여 그분을 자기 인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와 기준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이다. 그분께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거는 것이다. 이것이 순교가 아니면 무엇인가!천주교 신앙은 어떤 '악세서리'나 '취미'도 아니고, 어떤 '사상', '주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생활의 한 분야나 인생의 어떤 기간에만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생활의 모든 분야와 인생 전체를 총괄하고 그에 깊이 침투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여러 가지 현세적, 인간적, 물질적인 일에 종사하며, 그 일들은 종교와 신앙과 독립된 자율적인 것이지만, 천주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의 구석까지 침투하고 그것을 그 가장 심오한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지탱하고 그 내부에서 활성화하며 그것을 최종 목적을 향해 이끄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천주교의 신앙을 사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점점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 마침내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자기 생명과 마음으로 하여 사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갈라 2,20).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전부를 바치시고 순교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이어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순교의 생명과 마음과 다르지 않다.

 

바오로 사도가 거듭 강조하듯이, 이 그리스도화(化)는 문자 그대로 나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현실이자 진실이 된다. 나의 육적인 생명과 마음은 죽어 없어지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음이 들어와 내 안에서 살고 느껴지면서 그것이 나의 진정한 생명과 마음이 된다. 나의 생명과 마음이 없어지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음이 들어와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음으로 살수록 나는 더욱 나 자신이 되고, 나의 생명과 마음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의 "알파와 오메가, 곧 시작이자 마지막"(묵시 1,8)이시며, 나의 원천적인 원형이자 최종적인 목표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죽을수록 예수님께 살고, 예수님께 살수록 성화되고 완성된다. 그것이 순교가 아니면 무엇인가!

 

 

3. 현대 천주교 신앙의 본질도 순교

 

옛날 박해 시대에 신앙을 지키고 포기하는 것은 그대로 목숨을 바치고 살리는 것이었다. 신앙을 지키려면 목숨을 바쳐야 했고, 신앙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서 다른 길은 없었으며, 이 의미에서 그들의 신앙 생활은 쉽지 않았으나 단순한 것이었다.

 

현대에 신앙을 지키고 포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할 수 있으며, 주님께 충실하고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각양각색이므로, 이 의미에서 현대의 신앙 생활은 복잡한 것이다. 그것도 다 개개인의 내면에 일어나,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을 뿐더러, 본인도 의식하지 못할 경우가 적지 않다. 영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에 대한 불감증과 양심과 윤리 도덕 의식에 대한 둔화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옛날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은 언제 체포되어 목숨을 바쳐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경계하고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했다. 매순간 죽을 각오로 신앙을 살았던 것이다.

 

현대에는 신앙 생활을 충실히 하기 위해 아무 경계도 긴장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생활의 흐름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더 편안하고 편리하고 안락하고 안이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그래서 늘 깨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쉽지 않고, 나태해지고 미지근해지기 쉽다.

 

인류의 문화 문명, 과학, 의학의 발달로 누리게 되는 생활의 편리, 안락과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단련, 극기, 희생, 절제, 가난 등의 성덕 사이에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도 문화와 문명의 발달로 얻어진 혜택을 만끽하고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반면에, 끊임없이 희생과 절제를 실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의미에서 현대의 신앙 생활은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다. 그만큼 과감하고 단호한 자세로 죄악을 극복하고 쇄신과 회개와 자기 성화를 철저히 추진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순교의 마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 더 안이하고 안락한 방향으로 흐르고, 신앙 생활에 아무 긴장도 자극도 없기 때문에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한 '함정'이 있다. 그것은 한 번 세웠던 영적 결심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잊어 버리고 원래의 육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크고 확고한 결심을 세워 열심히 시작했다 해도, 점차 결심이 약해지고 생활이 나태해지고 미지근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난다."(갈라 3,3 원문 번역)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신앙 생활도 수도 생활도 성직 생활도 처음에는 순수하고 열성적인 영의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불순하고 나태한 육의 마음으로 변해 버린다. 처음에는 높은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노력하지만, 차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본능으로 내려가고 만다.

 

그럴수록 원래 지녔던 영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새로이 하고 시작하는 마음으로 세웠던 결심을 다시 열심히 실천하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그것은 곧 끊임없는 회개와 성화의 길이다. 현대의 순교는 바로 매일, 매순간, 한평생 자신의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더 회개하고 좀 더 자기를 성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자기 성화를 할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고 어떤 새 생명을 얻는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죽는, 하나의 '작은 죽음'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생명에 새로 살아나는, 하나의 '작은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파스카 신비'의 체험이다. 현대의 순교는 바로 매일 매순간 한평생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자기 안에 체험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적 체험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체험이며, 곧 현대의 참다운 순교인 것이다.

 

어떤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사람과 화목하여 사는 것이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용서하고 화목하는 것이 곧 순교하는 것이다. 분노와 미움을 억제하고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여 사랑과 친절을 실천하고 남을 칭찬해 주는 것이 바로 자신을 죽이는 순교의 행위이다. 깨끗하고 순결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고문을 받는 것보다 희생하는 순교의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순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어떤 성덕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결국 순교는 철저한 회개와 온전한 자기 성화 및 전적인 자기 봉헌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포기하고 봉헌하는 순교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의미에서 처형을 받아 목숨을 바친 순교자뿐 아니라, 처형을 받지 않았으나 한평생 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포기하고 봉헌했던 증거자 성인 성녀들도 역시 순교자인 것이다. 현재 우리 주변에도 복음을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남김 없이 포기하고 봉헌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다 현대의 진정한 순교자다.

 

예수님의 복음은 너무 순수하고 숭고하고 고상하다. 그것은 한치의 양보도 절충도 용납하지 않는, 너무 엄격하고 절대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고 지극히 어려운데도, 교회의 지난 2000년 역사에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순교자, 성인, 성녀들과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했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결점과 죄가 많은 사람이었는데도, 한번 예수님께 잡히고 매혹된 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지극히 어려운 일을 기꺼이 스스로 해냈고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찾아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이해와 가능성을 초월하여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다. 그 기적이 지금 우리 주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벌어지고 있다.

 

그분의 복음이 너무 순수하고 숭고하고 고상하며 실천하기 거의 불가능하고 지극히 어렵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매혹시킨 것이다. 만약 복음이 순수하지도 숭고하지도 고상하지도 않고 실천하기 거의 불가능하고 지극히 어렵지도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잡고 매혹시킬 수 있었겠는가? 한편,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동으로써 그 순수하고 숭고하고 고상한 복음을 불순하게 만들었고 그 높은 수준을 깎아 내렸고 그 복음의 순수성과 숭고함을 상실하게 했고 아무 매력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주교가 원래 순교의 종교임을 잊어 버리고 육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 나태하고 미지근한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앙을 사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체험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영적인 마음을 지니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쉬워지고 불가능한 일마저 가능해진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희생하고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게 된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육적인 마음을 지니면, 쉬운 일도 어려워지고 가능한 일마저 불가능해진다. 작은 희생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기도를 바치고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마저 불가능해진다.

 

사람의 인생에 무엇이 어렵고 쉬우며, 무엇이 불가능하고 가능하느냐 하는 것은 일의 내용보다도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라도 사랑으로 충만한 영적인 마음에는 쉽고 즐겁고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쉽고 가능한 일이라도 사랑이 없는 육적인 마음에는 지극히 어렵고 희생처럼 느껴지고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리의 육적인 모습을 보고 누가 복음에 매력을 느끼겠는가? 우리의 육적인 삶을 보고 누가 천주교에 마음이 끌리겠는가? 하늘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고 어떻게 느끼고 말할 것인가? 아마 다음과 같은 말을 할는지 모른다. "당신이 지금 사는 신앙과 내가 살았던 신앙이 똑같은 천주교의 신앙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 스스로 바쳤는데, 당신은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과연 무엇을 버리고 바쳤는가! 정말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겠다." 우리는 순교자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4. 오늘날 순교의 삶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몽땅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을 바치는 것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 철저히 복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순교는 바로 자기 봉헌의 전면성과 철저성을 의미한다. 순교는 결국 자신의 철저한 회개와 진정한 성화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천주교 신앙을 진실로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면적이고 철저한 참 신앙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순교의 삶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수 있을까? 몇 가지 실천 사항을 나열한다.

 

1) 회개와 성화의 길을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간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회개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성화되도록 노력한다. 주님의 회개와 성화로의 부르심을 이제까지 완고하게 거부한 자신의 영적 고집을 부수고, 그 부르심에 온순하고 너그러이 '항복'하고 '굴복'하여 주님의 사랑에 자신을 모두 던져 버린다. 이제까지 주님께 비워 드리지 못했던 마음의 '마지막 보루'까지 비워 드리고 온전한 회개와 성화를 이루도록 한다.

 

2) 어떤 큰 일이나 대단히 어려운 희생을 가끔 하는 것보다 매일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 미소하고 별것 아닌 일들을 큰 사랑으로 정성 들여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더욱더 가치 있는 성화의 길이다. 진정한 성화는 매일 반복하는 기도, 집안 일, 직장 일, 여러 사람과 나누는 인사, 이야기, 별것 아닌 식사, 수면, 휴식, 오락, 취미 등, 하나하나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하는 데 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31).

 

3)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의 모든 면에서 '남을 위한 자'가 된다.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중심이 아니라 남 중심으로 산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모든 행동과 생활과 고생을 한다.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며, 남을 기쁘게 해 주는 일에 기뻐하고, 남이 주님의 사랑을 맛들이고 남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도록 한다.

 

4) 모든 육신적, 정신적 고통을 예수님의 속죄적 고통과 합쳐 자신과 남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봉헌한다. 고통을 인내와 끈기로 받아들이고, 기쁨과 희망으로 극복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성화한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코 기쁨과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는 고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아마 기도보다 많은 은총을 받는 계기가 된다. 자신이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신중하게 행동하고,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게 되고, 하느님께 더 의지하게 되며,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지고, 예수님께 가까워지고 진정으로 성화된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은총이요 십자가의 신비다.

 

5) 어떤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굳게 믿고 그분께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을 끝까지 따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과 의욕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고 약간의 성과라도 올리기 위해 힘을 다한다.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한다 해도 노력한 것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 노력에 반드시 보답하신다고 생각하여 만족한다. 아무리 세상이 어둡게 보이고 자기 생활이 캄캄하게 느껴진다 해도, 하느님께서 세상과 자기 생활을 감싸고 이끄시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세상과 자기 생활을 밝고 낙관적으로 보고 받아들인다.

 

6) 어떤 어려움과 분심이 있다 해도 기도를 꾸준히, 인내로이, 정성을 다하여 계속한다. 분심이 들었다고 알아차릴 때마다 차분한 마음으로 자기가 하고 있었던 기도나 묵상으로 되돌아가는 노력을 백 번, 이백 번이라도 반복한다. 이와 같은 기도는 아무 위로를 받지 않고 아무 만족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참으로 가치 있는 기도이며, 주님께서 틀림없이 점점 기도에 깊이 들어가 기도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 주신다.

 

어떤 기도를 할 때도 먼저 모든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미움, 시기, 분노 등을 없애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 열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순하고 온화한 마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한다.

 

하느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언젠가 어디선가 좀 더 좋은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확신하고 미리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7)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계획과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뜻대로 내가 움직이고 순종하도록 한다. 내가 하느님을 위해 얼마나 했는지를 따지지 말고,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해 주셨는지를 묵상하여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며, 늘 하느님께서 먼저 주신 은총의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갚지 못하여 정말로 죄송하고 부끄럽다는 마음으로 산다.

 

하느님께서 주시고 나는 받아들이고, 그분께서 용서하시고 나는 용서받으며,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경청하고, 그분께서 명령하시고 나는 순종하는 자세로 산다. 곧 나는 하느님 앞에 점점 '수동적 자세'로 산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행하고, 그분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며, 그분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대로 깨닫는 온순한 수동성의 삶을 산다.

 

8) 누구나 용서하고 몇 번이라도 어떤 일이라도 무조건 용서한다. 누구와도 화목하여 살며,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도 무조건 사랑과 친절을 실천한다. 마더 데레사는 말한다. "당신을 찾아온 사람이 당신을 떠날 때 조금 더 밝아지고 선해지며 행복해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얼굴에 친절, 눈에 친절, 웃음에 친절을 담아 따뜻하게 말을 걸어 주는 친절을 간직하십시오. 모두에게 늘 기쁨이 가득 찬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사목, 2002년 9월호, 김보록(서울 돈보스코 정보화센터, 살레시오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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