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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타종교의 순교에 대한 견해: 불교,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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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306

타종교의 순교에 대한 견해

 

 

불교의 순교

 

1. 사신공양(捨身供養)과 순교

 

순교란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신앙하는 종교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종교적 용기'를 의미한다. 신앙이 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태도'라고 한다면, 순교란 그러한 관심이 궁극적 용기로 승화된 행동이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법을 위해서는 자신의 몸도 버려야 한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구도 정신을 찬양하고 존중해 왔다. 불교의 순교 정신은 이러한 내면적인 치열한 구도심의 표현인 동시에, 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신공양(捨身供養)의 자비행이라 할 것이다. 

 

세계 종교사에서 순교는 이른바 셈족의 종교라 일컬어지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같은 절대적 유일신교(唯一神敎)의 전파 과정에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반하여 불교사에서는 순교 사건이 비교적 적게 일어났는데, 이것은 불교의 신앙 태도나 교리적 특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와의 경쟁이나 도전에 대해 관용과 평화의 덕목을 가르쳤으며, 모든 다툼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는 타종교의 박해에 대해 격렬한 싸움보다는 비폭력적 관용의 자세를 지켜 왔다. 또한 불교는 자기의 진리에 대한 절대성이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셈족의 경우와 같은 큰 충돌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그 지역의 토착 종교와 공존하면서 포용하는 이른바 종교 포괄주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므로 경쟁적인 종교의 강한 박해를 유발하는 일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타종교나 정치 권력에게 심한 박해를 받은 사례가 꽤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600여 년의 불교사에서 불교인의 순교 사례가 실제로는 적지 않았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2. 초기 불교 시대의 순교 

 

석가모니의 재세시(在世時)에는 수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른바 6사 외도를 비롯하여 62종의 종교 사상이 서로 경쟁하면서 다른 종교인을 박해하고 심지어는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도 타종교의 질시와 미움을 받아 순교한 이로 목갈라나(目連尊者)와 푸르나(富樓那) 존자가 있었다. 

 

신통(神通) 제일의 제자인 목갈라나는 회의주의자인 산자야의 제자로 있다가 나중에 지혜 제일 사리풋트라와 함께 출가하였다. 이른바 3명6통의 신통력을 갖춘 목갈라나를 불교를 미워하는 타종교인들은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불교가 흥성하는 것은 목갈라나가 이 교단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사주하여 몰래 살해하였다. 목갈라나는 한 번은 그 위기를 모면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업을 자각하고 스승인 석가모니에게 하직 인사를 한 다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푸르나는 인도의 서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 수나아파란타국 출신으로 출가하여 불법을 널리 펴는 데 가장 열정인 설법 제일의 제자가 되었다. 만년에 그는 수로나국에 가서 전도에 힘쓰겠다고 부처님에게 요청했다. 석가모니는, "푸르나여, 그 지방의 사람들은 성질이 사납고 흉악하다고 듣고 있는데, 만일 사람들이 그대를 대중의 면전에서 비난하고 비방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푸르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 때는 그들이 지팡이나 돌멩이, 또는 손질 발길질로 나를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 그들이 나무나 돌을 가지고 그대를 때린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때는 칼을 가지고 나를 상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칼로 상처를 입히는 날에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칼을 가지고 상처를 입힌다 할지라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칼로써 그대를 죽일 때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불자들 가운데는 인생의 온갖 고뇌가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칼이나 독물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고 했던 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끊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번거로움을 덜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이르자 석가모니는 "푸르나여, 나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그대에게 그만한 각오가 서 있다면 분명히 괜찮을 것이다. 수로나국에 가서 법을 펼치고 오도록 하여라." 하고 허락하였다. 어떠한 고난도 각오하고 서쪽의 수로나에 간 그는 끝내 불교를 미워하는 이의 손에 거룩한 순교를 하였다. 

 

 

3. 불교사에 나타나는 순교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불교는 힌두교와도 많은 갈등 관계를 빚어 왔다. 인도의 숭카 왕조 시대에는 힌두교의 심한 박해가 있었으며, 대승 불교 시대에는 용수의 제자인 제바의 순교, 사자존자의 순교 등이 있었다. 11세기 초에는 이슬람의 인도 침입으로 불교의 사원과 경전, 승려와 신자들이 모두 매우 큰 타격을 받아 인도 불교는 폐허화되었다. 이 때 순교한 승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1세기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도교, 유교와 갈등과 습합 관계를 거치면서 토착화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3무1종(三武一宗)의 법란으로 대변되는 바와 같이 중국의 고유 종교인 유교와 도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으며 순교한 불교인이 많았다. 또한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하기 위해 경전을 구하러 가다 순교한 이름 없는 스님들도 무수히 많았다. 4세기의 담무참은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와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초역하였으나, 다시 그 완본을 구하러 인도에 가다가 순교하였다. 그 밖에도 현고와 혜숭의 순교, 정애와 도적 등 7인 법사의 순교 사건이 있었다. 

 

한국 불교사의 전개 과정에는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 신라의 이차돈, 조선의 보우 등의 순교가 있었다. 4세기에 한국에 들어온 불교는 기존의 토착 신앙과 융합함으로써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불교 수용은 쉽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신라에 전도하러 온 정방 스님은 신라의 군신에게 죽임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차돈(異次頓, 506-527년)은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로서 내사사인(內史舍人)의 관직에 있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 신앙을 신봉하는 신민들의 반대로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이차돈은 불교의 공인을 주장하면서 불교를 배척하던 세력과 격렬히 싸우게 되었다. 그는 끝내 527년 순교를 자청하였고, 죽으면서 만일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이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과연 그의 잘린 목에서는 붉은 피가 아닌 흰 피가 솟아났다고 한다. 또한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반대하던 조신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신봉하고 이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를 신봉하던 권력자에게 불교가 박해를 받았으나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 되어 융성하였다. 조선 시대에서 와서는 유교를 국교로 하는 이씨 왕조에게 철저한 박해를 받아 곧 소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명종 때 문정왕후는 보우(普雨) 스님을 등용하여 불교 중흥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이 폐지한 승과 제도를 부활시키고 봉은사와 봉선사를 각기 선종과 교종의 중심 사찰로 지정하고 보우를 선종 판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도첩제를 실시하고 두 종파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걸쳐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였다. 도첩제에 따라 정기적으로 3년마다 한 차례씩 시험을 보아 15년 동안 승과에 합격한 승려가 4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여기에는 휴정·유정 등의 고승도 끼어 있었다. 보우는 선과 교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화엄의 이사원융(理事圓融)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유교와 불교가 본래 둘이 아님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우의 불교 부흥 운동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곧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보우를 체포하였다.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이 일었으나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만류로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보우가 제주도에 이르자 제주목사 변협은 조정과 여론의 동향을 간파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명종은 마침내 선교 양종과 승과를 없앴으며 도첩제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불과 15년 동안의 불교 중흥 정책은 보우의 순교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보우의 행적은 유교의 사가가 기록한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보우는 조선조 핍박받던 법란의 와중에서 불교를 다시 일으킨 순교자였으며, 존립의 위기에 처했던 불법의 등불을 고독하게 지키려다 고난을 당한 큰 보살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종교 탄압은 줄어들었으나, 세계 불교도 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의 정기 대회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세계 각국에서는 아직도 불교 박해에 따른 순교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힌두교를 옹호하는 인도 정부에 불교 사원들을 빼앗긴 상태에 있으며, 일부 힌두교도들은 불교 신자를 가혹하게 박해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전쟁 중 승려들의 소신 공양(분신 자살)이 잦았으며, 종전 후에도 수많은 불교 승려들이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또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많은 사원이 파괴되었고 승려가 되는 자유가 제한되어 순교자들이 속출하였다.

 

 

6. 불교적 순교의 특징과 의의 

 

불교의 순교자들은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몸을 희생한 대승의 보살도의 실천자들이었다. 불교의 역사에 나타난 순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의 순교 사상과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불교에서의 순교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다 바치려는 치열한 구법과 구도 정신을 의미한다.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기록한 문헌인 [자타카]에 보면, 석가모니는 보살 시절에 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구법 순교의 모델이 되었다. 혜초나 현장과 같은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인도에까지 가서 법을 배우고 경전을 구해 왔다. 당의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의 사신편(捨身篇)에는 법을 위해 몸을 바친 불교인들의 이야기와 그 가치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여기에는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찬양하면서 "왕자가 몸을 던지매 그 공덕은 9겁을 뛰어넘고, 살을 베어서 비둘기와 바꾸매 삼천 세계가 놀라며 진동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법에 대한 신심은 불교가 지닌 독특한 순교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곧 외부의 박해에 대한 처절한 투쟁보다도 스스로 구도를 위한 희생이나 다른 중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불교적 순교의 특징을 더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불교의 순교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는 사신공양(捨身供養)의 전통이 그 중심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도달한 성자의 정신력에서 나오는 궁극적 용기이다. 불전에는 다른 모든 생명[衆生]을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린 이는 곧 진리의 몸[法身]을 얻게 되며, 헤아릴 수 없는 환희를 얻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참된 구도자는 육신이 오온의 가합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른 중생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중생의 목숨이 곧 자신의 목숨과 둘이 아니라는 지혜를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셋째, 불교의 순교 정신은 자신만을 위한 수행보다는 타인에게 불법을 전해 주려는 자비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전법보다는 자기 수행에만 관심 있는 사문에게 푸르나는 "왜 중생들의 틈에 끼어서 그들을 제도하려 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자기 수행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자기 중심적 태도를 대승 불교에서는 소승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푸르나는 포교의 어려움에 대해 "불법을 널리 펴는 전법의 길을 모든 사람이 다 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받을 만큼 받고서 인연이 닿아야 스스로 불법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불교사의 대전환점은 거룩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차돈의 예와 같이, 편견과 보수적 전통의 벽을 넘어뜨려야 할 때 순교는 결정적으로 종교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넷째, 불교에는 타종교의 박해에 대해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순교의 유형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의 관용주의와 비폭력적 평화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며,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교리나 감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불경에는 미움은 노여움이 아닌 사랑으로 풀고, 악은 악으로서가 아닌 선으로 정복하라고 설하고 있다. 불교의 사신공양(捨身供養) 중 특히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전통은 이러한 무저항적 순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김용표(동국대학교 교수, 불교학>

 

 

이슬람교의 순교

 

어느 민족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종교가 그 사회에 신앙으로서 자리 잡기까지는 여러 가지 종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민족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겪었으며 그 때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이셔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셨다. 

 

이슬람교 역시 사도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초기 선교 과정에서 불신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수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그에 따른 희생과 순교가 거듭되었다, 그러나 순교로 말미암아 이슬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슬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급기야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믿음에 대한 신념이었는데 하느님께서 그 때마다 꾸란의 계시를 통하여 순교의 진정한 의미를 확고히 심어 주셨다. 

 

무지와 힘의 원리만이 지배하던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이 계시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기 시작한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진리의 가르침은 믿음에 대한 확신과 친화력을 가지고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신교도들이었던 꾸레이쉬 부족에게 이슬람을 따르는 것은 반역 행위이며 민족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꾸레이쉬 부족은 모든 능력과 방법을 동원하여 박해를 시작하였고, 사도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제안한 어떠한 형태의 아름다운 유혹에도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라 일라하 일랄라"(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나니.)를 외치며 죽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순교에 관한 구절이 [성꾸란]에 많이 나와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길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죽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그들은 살아 있나니, 너희들이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2장 154절). 

"만일 너희들이 하느님의 길에서 살해되거나 죽었다면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있을 것이니라. 이것은 너희들이 현세에서 축적한 그 무엇보다 더 나으리라. 너희들이 하느님의 길에서 죽었거나 살해되었다면 너희들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리라"(3장 157-158절). 

 

"하느님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살해되거나 죽었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훌륭한 양식으로 부양하시니, 실로 하느님은 가장 훌륭한 부양자이시니라.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편안한 천국에 들게 되리니, 진실로 하느님은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시니라"(22장 58-59절). 

 

계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내세의 보장은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는 값진 희생으로 승화되었는데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이러한 어려운 여건들을 잘 견디어 내고 기꺼이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본보기를 사도들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기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예로서 모세(그분에게 하느님의 평화가......)에게는 그 당시에 가장 성행했던 마술이나 요술의 경지를 초월한 또 다른 현상을 보여 줌으로써 불신자들과 융화될 수 있는 기적을 보여 주셨고, 예수님(그분에게 하느님의 평화가......)께는 그 당시에 가장 발전했던 의술로써 인간의 한계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기적을 보여 주심으로써 추종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새겨 줄 수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계시 받은 이슬람교 역시, 무함마드(그분에게 하느님의 평화가......)를 통하여 그 당시 민족들 사이에 가장 성행했던 시적인 능력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꾸란을 계시함으로써 그를 불신했던 민족들로부터 23년간의 짧은 선교의 역사에도 기적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사도 무함마드의 행동과 의지로 추종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이로써 추종자들이 수적인 열세에서도 어떠한 형태의 고통도 참아낼 수 있도록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성꾸란]은 이러한 행위를 정의로운 일로 여기며 값진 인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성꾸란]의 순교와 관련된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약속을 지키며, 고통과 역경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의 길이며, 실로 이들이야 말로 진실하게 사는 의로운 자들이니라"(2장 177절). 

 

"오! 믿는 자들이여, 인내하라. 그리고 인내함에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 서로 단결하라.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라. 진실로 너희들은 기쁨을 맛보리라"(3장 200절). 

 

모든 것이 풍족하고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겠다는 살신성인의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준 우리보다 먼저 죽어간 그분들의 거룩한 정신을 상기하며 자신의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순교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성꾸란]에 나온 순교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을 인용해 본다. 

 

"하느님의 길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죽었다고 간주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그들은 주님의 곁에서 은총을 받으리니, 그들은 하느님께서 배푸신 은혜에 기뻐하며 뒤이어 올 순교자들에게 이 충만한 기쁨을 전하리라. 실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슬픔도 없으리라. 

 

그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과 특별한 배려에 기뻐하니, 실로 하느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업적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니라"(3장 169-171절). <이주화(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사무처장)>

 

[사목, 200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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