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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순교돌의 용도는 무엇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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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309

순교돌의 용도는 무엇이었나

 

 

신화나 전설은 아름다운 것일까, 아니면 사실의 이해를 방해하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는가? 신화와 전설을 만드는 사람들의 아리따운 마음과 깊은 지혜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신화와 전설에 매어있을 때 역사적 사실은 병들어 죽게 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에 정확성이 결여되면, 오늘과 내일을 향한 상황판단도 그르치게 된다. 이 때문에 역사에서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 교회사의 서술과정에서는 객관적으로 인정되기 어려운 신화적 요소들이 심심치 않게 남아있다.

 

 

신화를 벗어나려는 움직임

 

성서학은 잘 모르지만, 현대에 이르러 성서학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성서해석에 미친 신화적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다. 성서에 대한 탈신화화 내지는 비신화화 작업은 현대 성서학의 기초를 이루어주었다. 하물며 성서학이 이러할진대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의 경우에는 더욱 어떠해야 하겠는가?

 

한국교회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비신화화 문제가 심각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다. 한국교회사의 일부에는 일종의 잘못된 ‘신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 창설과 관련하여 조작되거나 과장되어 있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신화도 적지 않게 살아있다. 특히 순교와 관련된 서술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일부 남아있다.

 

전설이 서린 고향에의 추억이 아름다워 전설은 더욱 아름답게 꾸며진다. 이렇듯이 순교자의 신앙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뒷날 사람들은 그 순교를 더욱 처절하고 아름답게 써내려 갔다. 이 때문에 우리 교회사와 순교자는 너무나도 거룩하게 서술되어, 그들의 순교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유리되어 갔다. 이 현상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된 삶과 믿음의 이해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사에서도 비신화화, 탈신화화 작업이 요청된다.

 

 

‘순교돌’의 신화

 

우리 나라 성지에는 도처에 ‘형구돌’ 또는 ‘순교돌’로 불리는 석물이 있다. 이 돌의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둥글거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있고, 돌 가운데 구멍이 패여있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조선왕조 정부에서 신자들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때 이 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곧 이 돌은 건물의 벽에 부착되어 있던 형구의 일종으로, 신자들의 목을 맨 밧줄을 돌 가운데 구멍에 끼우고 건물 밖에서 형리가 잡아당겨 교수(絞首)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석물은 서울의 절두산과 수원교구의 죽산 성지, 대전교구 공주의 항쇄바위(혹은 황새바위), 청주교구의 연풍 성지 등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밖에도 대구 관덕정과 부산 오륜대에도 이 돌이 순교의 상징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석물을 ‘순교돌’로 해석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였다. 한국순교자에 대한 각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던 사제 한 분이 어느 날 토목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공사 중 발굴된 이 돌에 관한 인부들의 대화를 들었다. 인부들은 이 돌의 쓰임새에 대해 갑론을박했다. 이때 ‘범상치 않게’ 생긴 한 인부가 “이 돌은 지난날 천주학쟁이들의 목을 맬 때 쓰던 형구다.”라고 했다. 이 말에 귀가 번쩍 띈 그 사제는 이 돌을 성지에 옮겨놓고 멋진 설명을 달아주었다. 그뒤 이렇게 생긴 돌은 ‘순교돌’이나 ‘형구돌’이 되어 성지를 장식하는 단골 품목이 되었다. 순교돌의 신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형구돌’의 쓰임새

 

이 ‘형구돌’은 우리 나라 도처, 곧 폐허가 된 사찰지나 관아 건물 등 규모가 큰 건물지의 발굴과정에서 흔히 반출되는 유물이다. 이 석물은 고려시대의 사찰이었던 고달사지(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나 법천사지(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법천리)에서도 나왔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유물인 경상북도 군위의 삼존석굴 정원에도 이 석물이 장식용 돌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정원의 ‘형구돌’도 본디 이곳에 자리잡았던 사찰건물과 관련됨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형구돌’은 과거 관청 건물 등 큰 건물이 있던 지역의 발굴이나 토지 정리과정에서도 반출되고 있다. 연풍 성지의 토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제법 큰 이 돌이 발굴되어 연풍 성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연풍 성지 일대는 연풍 관아터였으니, 이 돌은 관아건물과 관련된 유물이다. 대구 관덕정의 형구돌도 동아 쇼핑 센터의 토지 정리과정에서 반출되었다. 그 자리는 조선왕조 때 관청 건물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이렇게 이러한 돌들이 사형집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찰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대규모 건물에서 사형을 집행했던 것도 아닐진대 관청 건물과 같은 큰 건물의 집터에서 이 석물이 나오고 있다. 그 반출처를 감안할 때, 이 돌은 일단 사형집행용 도구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유물이라는 심증이 간다.

 

그렇다면 이 돌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곧, 이 돌은 건물 출입문의 회전축을 받쳐주던 돌이었다고 한다. 한옥의 처마를 받쳐주던 기둥의 주추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하고, 연자방아의 회전축 밑에 있던 돌이라고도 설명한다. 이 돌에 구멍이 뚫린 이유는 회전축을 지탱하는 곳에 빗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돌에 있는 구멍은 교수용 밧줄을 끼우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우리 나라 신자들은 ‘순교돌’ 앞에서 신앙선조들이 보여주었던 강인한 신앙심을 되새기고 있다. 그러나 이 석물에 관한 여러 설명과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이 돌은 형구가 아니라 생활용구 내지는 건축자재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돌을 ‘형구돌’로 확정짓기 위해서는 범상치 않게 생긴 한 인부의 말보다는 정확한 문헌기록이나 좀더 풍부한 증언이 요청된다. 그러나 이러한 돌이 교수형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현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돌을 ‘순교돌’이나 ‘형구돌’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 돌은 섬뜩한 사형도구가 아니었으므로 사찰정원의 장식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영남 지방의 어느 민가는 아예 이 돌을 여러 개 모아서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도 했다.

 

백보 양보하여 이 돌이 교수형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형태의 모든 돌을 형구의 일종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병인박해 때 대들보 두 개로 한꺼번에 20~25명을 죽일 수 있는 처형도구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하여 모든 대들보를 사형도구로 보지는 않는다. 동일한 논리에서 그와 같은 형태의 모든 돌을 ‘순교돌’이나 ‘형구돌’로 해석하는 일은 비역사적 해석일 뿐이다. 이 비역사적 해석에서 건강한 순교신심은 기대될 수 없다. 잘못된 신화는 깨져야 한다.

 

[경향잡지, 2001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교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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