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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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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1-24 ㅣ No.320

데스크 칼럼 - 성지 유감

 

 

교회에서 흔히 '성지'라고 부르는 용어에는 엄밀히 말해서 두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건의 배경이 되는 땅, 곧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오늘의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지역)를 통칭하는 용어로, 말 그대로 '거룩한 땅'이란 뜻의 성지(聖地, Holy Land)를 가리킨다.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의 성지(聖址, Holy Place)로, 이것은 팔레스티나 전체가 아니라 예수 생애의 특징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 예컨대 요르단 강, 골고타 언덕, 베들레헴, 예루살렘 등을 가리킨다. 

 

이 두번째 성지 개념은 차차 확대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곳만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 순교자들과 관련된 장소에 대해서도 성지(聖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지나 발현지, 순교자나 성인들의 순교지나 묘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성지들 가운데 성지(聖地)는 하나도 없고 대부분이 성지(聖址)들이다. 또 이 성지(聖址)들 가운데서도 사실은 성지가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유서 깊은 사적지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인 솔뫼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 그리고 성인의 입국 장소인 나바위 등지는 엄밀히 말해서 성지가 아니라 사적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성지(聖址)를 성인들의 순교지나 묘지로 국한할 것인가 아니면 생장지나 주 활동 중심지까지도 포함해야 할 것이냐를 규정하는 일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지(聖址) 개념을 분명히 하고 성지(聖址)와 사적지를 구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은 성지(聖址)나 교회 사적지를 개발하기에 앞서 개발하려는 성지나 사적지가 과연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곳이냐 하는 점을 충분히 검토, 확인하는 일이다. 성지 또는 사적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보존하려는 노력과 이를 성지나 사적지로 본격 개발하는 문제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80년대 이후 성지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우리 교회는 성지 또는 사적지로 추정되는 곳들에 대해 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최근 순교자 묘지가 있는 지방 교구의 한 성지에 대해 순교자 묘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진위' 논란이 일고 있다. 더욱이 이 논란은 주변 부지 매입 등이 마무리되어 성전 건립 등 본격적인 공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새롭게 제기된 것이어서 만일 성지(聖址)가 아닌 곳으로 밝혀진다면 그 파장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일선 본당 사제들 가운데에는 수도권의 잘 알려진 한 성지에 대해 신자들에게 '그곳은 성지가 아니니 순례를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무분별한 성지 개발에 따르는 인적, 물적인 비용 낭비를 줄이고 신자들이 겪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성지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성지로 추정되는 곳에 대해서도 개발에 앞서 충분한 검증과 확인 작업을 거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본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24일, 이창훈(취재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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