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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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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881

[경향 돋보기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가 자주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님의 기도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아버지의 뜻은 달리 표현하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전제조건들이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려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청하는 것이며, 진정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사는 이 땅에서도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가져다주는 참된 평화! 하느님의 질서가 우리 교회와 사회교리의 가르침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폭넓게 이해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정의 없이는 평화가 없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메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늘 조건부로 선포된다. 곧 정의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것이다(시편 72,3-7. 85,9-11; 이사 32,17). 평화를 소개하는 많은 다른 성서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갈등과 경쟁에서 치열한 삶을 통해, 정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로 주어진다는 체험을 들려준다. 우리는 이처럼 성서가 전하는 평화란 정의가 이뤄진 상태를, 그리하여 불의한 적이나 상황이 심판을 받아 평온하거나 적어도 힘의 균형으로 전쟁이 더 이상 없는 상태로 이해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약의 복음에서는 평화가 갈라져 대립한다. 곧 세상이 주는 평화와 하느님의 평화를 대립시키며(마태 10,34), 결국 구세사 전체를 통틀어 마지막 시대에 확고하게 드러난 평화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런 성서적 근거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우리 가톨릭교회의 평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로 그 이해의 폭을 점차 넓혀간다.


전쟁은 실패한 평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Pax Romana’에서 이어져 오는 평화의 이해가 지배적이었고 따라서 평화를 논할 때는 대부분 정당한 전쟁과 합당한 방법에 주목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새로운 윤리적 방향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모든 수단을 사용해도 폭력이라는 악을 막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다면 제한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정당한 전쟁론은 이성적 판단에 따라 정의의 차원에서 일정 부분 전쟁을 허용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 전쟁에 엄격한 기준을 전제로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어떠한 전쟁도 폭력의 행사이기에 정당한 전쟁을 인정하는 교회의 평화 이해는 비폭력적 평화주의와 공존하기 어려워 보인다.

사실 인류는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기보다는 보습을 녹여 칼을 만드는 역사를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불가피한 전쟁과 평화라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 중에서 어느 가치를 딱히 전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런 교회의 가르침은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사회교리를 통해 서서히 변화하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곧 인간의 이성과 교회의 사회교리, 윤리적 성찰들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불가피한 전쟁, 이유가 정당한 전쟁은 존재한다는 또는 지지한다는 입장이 부정되지는 않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실패한 평화로 간주하며 평화주의적 가르침을 강조한다.


“평화는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상실된다”(비오 12세, 라디오 담화, 1939년 8월 24일)

요한 23세 교황은 평화란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해 온 것으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되고 견고해진다고 가르친다(「지상의 평화」, 1항). 이는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는 것, 곧 보편적 공동선을 위한 이상적 상태를 평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핵무기와 같은 엄청난 무력을 통한 균형이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전쟁의 정당함이 아닌 평화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묻고 따지는 윤리적 방향의 새로운 전환이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평화가 언제 깨질 줄 모르는 긴장관계 안에서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창조주요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평화의 군주(위의 문헌, 167항)이신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진리, 정의, 사랑, 자유라는 질서를 사회생활의 상호관계 안에서 재구성하여 신뢰와 희망 위에 자유를 갈망하며 사랑으로 활성화되고 완성시키는 평화, 곧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실현하고 건설하는 평화가 참된 평화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동안 전쟁의 정당성을 가늠하던 교회는 더 이상 ‘지키고 유지하는’ 좁은 의미가 아닌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원에서 평화를 ‘실현하고 건설해야’ 할 의무로 확대한다. 이는 평화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 안에서 평화를 견고케 하고 개인적 차원을 넘어 평화의 의무를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추구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회피하고 국제적 공동체를 건설하여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려고 모든 사람들과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며(에페 4,15 참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평화를 강구하고 건설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실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로부터 사랑의 열매(사목헌장, 78항)라는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민족들의 발전」, 76항)

바오로 6세 교황은 일찍이 아프리카와 남미, 팔레스티나와 인도 등지를 여행하는 기회들을 통해 지나친 경제, 사회, 문화적 불균형으로 긴장과 불화가 생기며 이 때문에 평화가 위협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민족들이 겪는 심각한 곤경을 성찰하며 발전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길이며 인류가 평화를 증진시킬 책임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인간의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윤리적 발전을 위해 우리가 빈곤과 부조리를 거슬러 싸우는 것은 전 인류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이고 이제 평화란 발전이며 이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류 전체의 발전과 복지 사회까지 겨냥한 인간의 평화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각 민족들은 형제적 사랑으로 협력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통해 하루하루 노력할 때 발전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평화는 연대의식의 열매”(「사회적 관심」, 39항)

개발과 해방이라는 과정은 연대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서 올바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하느님께서 인간 존엄성의 수호와 촉진을 우리 각자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은 언제든 우리 인간은 창조주 앞에 우리의 삶에 대한 엄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평화 속의 개발’을 확보하려고, 우리는 자연과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존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교회도 산업화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무분별한 개발과 발전의 심각성, 각자 개인적 책임의 심각성을 의식하도록 하는 한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과 연대의식에서 출발하는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청한다.

한편 우리는 발전의 개념 자체를 재검토하도록 요청받는다. 곧 온 인류의 공동선에 대한 관심에 의하여, 또 개인적 이윤의 추구가 아닌 “모든 이의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발전”을 배려하는 “인간들 사이에 더욱 완전한 정의”의 결실로서 평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발전이며 이런 인간의 진정한 발전은 평화를 위한 목적을 온전한 개발, 다시 말해 누구나 그토록 추구하는 평화의 목표인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정의를 구현함으로써 성취된다.

또한 우리는 평화를 위해 덕들을 실천함으로써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니, 그 덕이란 인간들의 공동 일치를 신장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단결하여 사는 법을, 주고받는 가운데 새 사회와 더 나은 세계를 단결하여 건설하는 법을 가르치는 연대 등을 말한다.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베네딕토 16세, 제4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창조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시작이며 기초”이기에 피조물 보호는 이제 인류의 평화 공존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가히 호모 루푸스(Homo Lupus)라고 할 만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는 전쟁, 국제분쟁과 지역분쟁, 테러, 인권유린과 같이 참되고 완전한 인간 발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낳았다. 그동안 우리가 이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발전이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와도 긴밀히 결부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특별히 환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자연의 활용과 사용에서 인류 전체, 특히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에 대한 공동책임이 늘 수반된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땅의 평화의 일꾼으로서의 우리의 소명과 가치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천상선물이다

우리는 평화를 끝없이 희망하고 추구해 왔다. 예를 들면 전쟁이 사라진 삶, 갈등과 분쟁이 사라진 삶 등등, 하지만 이제는 소극적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평화의 차원을 넘어 실현하고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함이 보장되고 심지어 인간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모든 새로운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기꺼이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교리는 결국 평화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천상선물이며 은총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이 사실은 평화를 구하는 모든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가장 막중한 책임의 행사를 요구하며 오늘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일을 바로잡도록 초대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평화에 소극적이라면, 평화라고 부르는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굴복과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각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평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와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비록 정당한 전쟁론의 전통을 주요한 내용으로 다루기는 하나, 결국 우리 교회는 모든 전쟁은 평화의 실패라는 선언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이고 지역적인 전쟁을 넘어 우리의 내면의 갈등과 차별, 영적인 투쟁까지도 포함하는 평화의 실현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추구를 통해 날마다 조금씩 이룩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평화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때에 우리 안에 분쟁과 폭력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게 된다.

평화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가치로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그럴 때에 평화는 가정과 또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들 안에서 자라나 결국 화합과 정의에 대한 존중이 배어있는 분위기에서 참된 평화의 문화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인간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사목헌장, 78항)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평화의 기도는 우리에게 복음적 내용에 따라 평화의 가치를 성찰케 한다. 인간을 당신을 닮은 존엄한 존재로 지어내시고 우리가 서로 조화롭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오늘날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인간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들 안에서 하느님의 질서가 필요하다.

생명의 존중과 증진이라는 차원에서 평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선익 보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사람들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등이 없이 평화는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 평화는 “질서의 고요함”이자 “정의의 결과”(이사 32,17)이며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배현철 요셉(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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