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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설립 350돌 맞은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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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3 ㅣ No.76

설립 350돌 맞은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


본토인 사제양성 및 전통 문화 존중 원칙 고수

 

 

-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6개월 안에 대부분 순교했다. 그림은 샤를르 쿠베르탱이 그린 도리, 위앵, 볼리외, 브르트니에르(왼쪽부터) 신부의 선교식 파견 장면.

 

 

6일 프랑스 파리 중심가인 뤼드 박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뜻깊은 행사가 소박하게 열렸다. 바로 '아시아 선교 350년의 역사와 모험'을 주제로 한 전시회였다. 이 행사는 올해로 설립 350돌을 맞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주최한 첫 행사로 올 한해 동안 다양한 축제가 펼쳐진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회원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로 하나된 신앙의 형제로서 유대를 맺어오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350돌을 맞아 그 선교 정신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설립 배경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파견가 중에서).

 

24살부터 30대 초반의 젊은 사제들이 아시아 선교지로 파견될 때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 모여 동료 선교사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다. 남아있는 사제들은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고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떠나는 선교사들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모두가 복종해 칼과 도끼에 용감히 맞서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 노래가 끝나면 파견 선교사들은 동료들과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마차를 타고 보르도 항구로 가서 아시아 선교지로 떠난다. 그리고 3개월에서 6개월 후 이들의 순교 소식이 어김없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날아들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되던 17세기 당시 아시아에선 포르투갈이 교황청으로부터 '선교 보호권'을 위임받아 중국 난징과 베이징, 필리핀 마닐라, 마카오,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선교 보호권이란 그 지역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교구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십일조 징수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행사한 권한을 말한다.

 

교황청 의도와 달리 선교 보호권이 해외 선교에 도움이 되기 보다 국왕의 권한 남용으로 폐단이 더 심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수도회간의 불화가 점차 심해지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재위 1621~1623년)는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 교황청에서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케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이 설립될 당시 프랑스에선 파리를 중심으로 교구 사제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성체회'라는 신심단체가 활동했다. 이 성체회는 교황청에 지금까지 수도회 중심이던 외방선교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이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년)가 1658년 이 요청을 받아들여 라오스와 코친차이나, 중국 남부 지역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가 설립됐다.

 

 

회칙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선교 단체로 설립됐기에 특별한 영성을 토대로 조직된 수도회처럼 헌장이나 회칙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의 선교 지침에 따라 선교 지역에서 본토인 성직자를 양성해 확보하는 일에 가장 큰 비중을 뒀다. 17세기 당시 외방선교는 주로 예수회나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수도회에 의해 이뤄져 교구 조직에 바탕을 둔 교회의 구조적 기반이 미흡했다.

 

특정 수도회가 선교지역에서 양성한 성직자는 수도회원으로 활동하기에 그 수도회가 해당 선교지역에서 철수하면 그 곳 출신 성직자들도 함께 떠나 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청과 교구 사제들로만 구성된 파리외방전교회는 해당 지역 본토인 성직자를 양성해 본토인 자치교회 설립을 주 목적으로 활동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또 교황청 선교 지침에 따라 '선교지의 전통 문화와 관습 존중'을 사제 양성 다음으로 중요시했다. 포교성성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선교 활동의 목적은 선교 지역에 유럽화된 교회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톨릭 신앙만을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그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의식, 관습, 도덕관념 등이 종교와 윤리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를 바꾸려 들지 말고 또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본토인 사제양성과 전통 문화 존중이라는 두 원칙을 순교로 고수함으로써 아시아 선교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

 

 

한국교회와의 인연

 

파리외방전교회가 우리 민족, 좁게는 한국천주교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년)가 즉위하자 마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샴(현 태국) 보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면서다.

 

포교성성 장관직을 수행하다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 16세는 장관 추기경 시절, 1824년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 요청을 위해 교황께 보낸 편지를 읽고 조선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방침은 본토인 사제양성과 전통문화 존중이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정원에 있는 한국순교성인 현양비와 팔각정. 각 선교지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팔각정에서 동료들과 작별한 후 마차를 타고 보르도항으로 가서 임지로 떠나는 배를 탔다.

 

 

그는 예수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어 파리외방전교회에도 요청했으나 역시 △ 선교사 부족 △ 선교지 운영 예산 부족 △ 조선 입국로 불확실 △ 회원 동의 필수 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청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그레고리오 16세는 교황으로 즉위하자마자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는 1833년 조선 선교지 책임을 수락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또 조선교구 설정을 계기로 중국 내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잔재를 척결하고 포교성성의 선교권을 강화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 요청대로 1838년 북경교구에서 만주교구를 설정했다. 또 1841년 홍콩과 말레이 반도, 1846년 티베트, 1855년 미얀마, 1899년 말레이지아 교구를 설립,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했다.

 

이처럼 교황청은 한 명의 선교사도 없던 신생 조선 교회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또 조선대목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주대목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분할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서 선교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됐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자생적 탄생과 조선대목구 설정의 세계 교회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양성을 시작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치교회로 성장해 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선교의 책임을 맡을 만큼 성장하는 밑거름이 돼 왔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그 중 14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순교자 학교에서 사제양성 요람으로

 

올해로 설립 350주년을 맞은 파리외방전교회는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성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오늘날 지원자 부족으로 외방선교의 주임무보다 세계 각국에서 프랑스로 유학온 신부들을 받아 공부시키는 '신학원' 역할을 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는 현재 100여 명의 유학 사제들이 있으며 이들 중 한국인 사제도 9명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 주로 신학교 교수로 소임을 맡게 되고 일부는 선교사로도 활동하게 될 것이다.

 

콜롱 부총장은 "파리외방전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선교지의 현지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선교 활동을 펼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며 "가톨릭 불모지인 아시아에서 수없이 많은 회원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 원칙을 고수했기에 가톨릭에 대한 거부감을 차츰 없앨 수 있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평화신문, 2008년 1월 1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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