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안중근의 아내와 그 자녀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5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안중근의 아내와 그 자녀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를 영웅으로 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살붙이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서른한 살 한창나이의 청년 안중근도 죽음을 앞에 두고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했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아내를 걱정했다. 특히 안중근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맏아들 분도를 그리워했다.

 

 

안중근의 유언

 

안중근은 안태훈 베드로와 조 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나 김아려 아녜스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녀 안현생과 맏아들 분도, 둘째 아들 준생 마태오가 그들이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그의 부친은 이미 서거했지만 모친이 생존해 있었다. 안중근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사촌인 안명근과 여러 숙부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그의 친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여순 감옥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 이들에게도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이때 안중근은 아무래도 눈에 밟히는 여섯 살배기 맏아들 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장손 분도가 신부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안중근은 그의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안중근의 가족

 

의거 이전에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뒤늦게 도착한 그의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코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안중근 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이르러 이곳에는 안중근의 어머니와 첫째 동생인 안정근 내외 그리고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경 코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은 도산 안창호와 이갑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이주하고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분도가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했다. 분도는 안중근이 그의 부인과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년 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한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연해주의 동지들은 안중근 가족의 보호에 특별히 유념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샹하이로 1919년 10월에 이주한다.

 

 

안중근 가족의 샹하이 생활

 

샹하이로 이주한 안중근 가족들은 남영길리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평안도 출신 서북지방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흥사단의 샹하이 지부가 있던 선종로나 기호지방 인사들의 거주지였던 애인리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안중근 가족의 샹하이 정착에는 도산 안창호가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구한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과 잘 알고 지내던 백범 김구도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샹하이 시절 초기 어머니 조 마리아와 안중근의 아내와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었다.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 마태오가 생장한 곳은 샹하이이다. 안준생은 이곳에서 수학했고, 샹하이의 가톨릭 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그는 정옥녀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시 안준생은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샹하이에 남아있었다. 그는 처가의 권유에 따라 헤로인 장사를 하여 치부했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서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가 세워져 있었다. 이때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등박문의 아들과 눈물의 악수 일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그는 이른바 내선일체의 길로 나아가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고 안중근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위에 가슴을 쳤다.

 

 

남은 말

 

안중근의 가족들에게 남편이요 아버지였던 안중근은 무엇이었을까? 안준생은 아직 핏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때에 아버지를 일제에 빼앗겨서 기억할 수 없었다. 그도 모든 이가 우러르는 아버지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한편으로 그는 평범한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무심함을 원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원망이 그를 자포자기로 내몰았고 ‘눈물의 연출’에 참여하게 했으리라.

 

안중근의 맏딸 안현생은 샹하이에서 황일청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맏아들 분도는 독살당했다.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1945년 이전 샹하이에서 죽었다. 해방이 되었다. 그 둘째 아들은 해방된 조국을 보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게다. 안준생은 그렇게도 그렸을 조국에 몰래 숨어서 들어왔다. 그리고 부산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해군 병원선에서 죽었다. 이처럼 안중근과 그 피붙이들은 겨레를 위해 순국하고, 독살당하고, 고생 끝에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거나 죄인이 되어 숨어지내다 죽어야 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혈족 가운데 11명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그의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와 현대 교회사의 축소판이다.

 

[경향잡지, 2003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1,31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