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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가정과 여성: 소통이 필요한 현대 한국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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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4 ㅣ No.619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소통이 필요한 현대 한국 가족


한국 가족 안에서 여성 역할의 변화

한국의 전통 가족은 부자관계가 중심인 가부장적 부계 친족제도의 일부였다. 부자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뿐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과 현재의 자손을 잇는 토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께 잘하는 것이 곧 조상을 위하는 것이었다. 가족은 영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족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아들을 낳고, 키우고, 출세하도록 온 집안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전통 가족에서 부부와 미혼의 자녀로 형성된 개별 가정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출가외인으로 키워져 시집을 가 자신의 가정이 아니라 남편 집안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 것이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로 간주되었다. 남편과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남편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친족집단이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을 때 집안의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접빈객’, ‘봉제사’였다. 자신의 자녀를 직접 키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여성들은 운명적으로 ‘여성’의 길을 받아들이며 ‘집안일’을 하면서 고된 시간을 보냈다. 여성들의 가정 내 역할은 나이가 들수록 권위를 갖게 되고, 며느리를 보면 집안 내 권력조차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삶은 억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면 좋은 날이 있다.”는 전통적 위로는 근대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교육 받은 여성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가정을 자유가 없는 삶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근대교육의 수혜자인 신여성의 주창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혼과 이혼’의 자유를 주장한 나혜석의 이혼선언문은 이러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현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사회발전을 위하여 여성의 자율적인 측면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여성이 근대화 이후 자신과 함께 ‘새로운 가정’을 이룰 남편을 고를 수 있는 입장으로 변해온 것이다. 여성들이 해야 할 역할도 많아졌다.

여성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살림을 하고 자녀양육을 하는 것이다. 근대적으로 또는 신식으로 살림을 하는 것이 가족에게도 좋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집안일을 하는 데 어른의 도움보다는 전문가의 조언이나 책에서 얻는 정보가 더 유용하기 때문에 어른들과 과거와 같이 일상적인 살림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더구나 산업화, 도시화의 영향으로 친척들이 지역적으로 가까이 살지 않아 서로 교류할 시간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척, 친지와의 거리가 소원해지면서 가정생활의 범위는 좁혀져 왔다. 이제 할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손자녀도 많아지는 추세다.

학교교육이 서구적 핵가족을 정상 가족으로 간주하면서 여성교육을 해온 측면도 이러한 추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근대 가족에서 강화된 여성 역할

현재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 가족 모델이 한국 가족의 이상형이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부와 미혼의 자녀로 형성되고 사회 경제적인 독자성을 갖고 있는 소가족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가정이 자리 잡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집안의 압력이나 친척 간의 관계에 따라 맺어진 중매혼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념으로서의 근대 가족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데는 얼마나 큰 한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환경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줄어들고, 부계 친족집단 자체의 범위가 축소되었지만 여전히 시집 식구들의 영향력은 남아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남편과 자신, 그리고 아이들만이 가족관계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래서 형태는 소가족이지만 이념적으로는 부계 직계가족제도를 따르고 있다고 1980년대 사회학자들은 주장해 왔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가족 형태와 기능은 한편에서는 자녀 양육과 살림을 새롭게 하면서 광범위한 ‘집안’ 식구들과의 교류도 소원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가정은 다양한 수준의 친척과 친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집안 내 식구들이 모두를 위하여 함께 노력해야 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연고주의’는 친척과의 관계가 지닌 중요성이 유지되는 중요한 기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친족 집단의 영향권에서 자유스럽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친척과의 관계는 활발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선별적 태도는 친족관계를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거리를 두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갖게 한다.

가족이 친족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었던 과거에 비하여 개별 가족이 개인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렇게 커지는 영향력으로 여성들은 다양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강화되는 경쟁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다방면으로 가족을 위한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초기 근대화 과정 속에서 어려운 가정 경제를 도우려고 나선 많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축소된 가족 내 성원을 위한 여성들의 노력과 희생을 대변해 준다. 이러한 활약상은 자녀 교육을 위한 ‘극성 엄마’와 그 맥을 같이한다. 과거에 ‘봉제사’, ‘접빈객’에 집중되어 일해 왔던 여성들이 이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전업 주부들에 더 집중적으로 요구되어 왔다. 취업 주부의 경우에도 이러한 가정에서의 압력에서 자유스럽기가 힘들다. 미취학 자녀를 위한 교육에 적극적인 노력을 한 것이 나중에는 각종 입시에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어머니들의 참여는 단순히 ‘극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의 새로운 기여, 영역이라고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역할의 축소 또는 집중된 기여는 한국사회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구식 현대 가족과는 다르다. 서구에서 가족이 쉬는 가정의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안식처 기능이며, 이 가정은 개인의 ‘사생활’의 토대가 된다. 가정을 사회와 명확히 구별하여 악에 찬 문제가 많은 사회에서 가족원을 보호하는 역할을 가정이 해야 되는 것이며 그 중심에 여성이 있다. 서구 산업사회에서 가정은 바로 이러한 편안함을 주는 곳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는 성인 남녀가 만나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가정은 이러한 서구식 모델에 비하여 사회와 더 밀착되어 있다. 가정은 사회로 진출하는 가족원을 위한 지지 기반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다. 이 기반은 경제적 여건을 만들어주고,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정을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로 만드는 데 신경을 쓰기보다 남편과 자녀를 잘 뒷바라지할 수 있는 여건을 장만하는 데 신경을 쓴다. 자녀를 위해, 남편을 위해 살림도 잘하고, 건강도 챙겨주지만 동시에 열심히 주변사람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가져다주어 다각적인 지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가족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집보다는 외부에서 쉬고, 가족은 필요하지만 편하지는 않은 모순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자신들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 중에도 바깥일이나 친구 일을 가족 일에 우선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근대 가족의 위기와 여성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형태적으로 한국 가족은 서구화된 핵가족화를 이상화하고 그 방향으로 변해왔다. 가족관계로 보면 과거 남성 중심의 친족관계가 약해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척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 대신 어머니나 부인의 가족과 가깝게 지내면서 한국 가족이 모계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생기게 되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최근에 급격히 늘어나는 이혼으로 가족 연대가 약화되어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저출산 현상과 함께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 가족을 떠받치고 있는 친족체계와 부부 간의 결합으로 이어진 고리가 해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한국 가족은 다른 한국사회의 부분들과 같이 압축적 경제성장기에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여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놀라운 교육열은 유능한 인력을 배출시켰으며 가족 중심의 자원 활용은 효율적인 근대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가정은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한국인의 노력이 바로 한국인의 가정생활에 그대로 반영되어 왔다. 가정생활의 중심에는 바로 여성들이 있으며, 가족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준비된 유능한 한국의 어머니들이 한국사회의 거대한 변화의 단초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치러야 할 비용은 엄청나며, 바로 이 비용으로 한국 가족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서구의 핵가족이 비록 실천에는 한계가 있지만 감정적 안식처로서 가정(home)을 지목하는 데에 반하여 한국의 가족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 아무 데도 갈 데 없을 때 갈 수 있는 곳으로서의 인식이 강해 보인다. 서구사회가 근대화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착되면서 파편화되고 기능적인 사회적 관계가 팽배되었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처로 감정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면 왜 한국 근대 가족에서 어머니들이 그러한 전문적인 ‘감정적’ 관계를 발달시키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설명을 하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인식하지만 가정생활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간에 운명적인 연대가 감정적인 연대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대가족에서 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육받았으며, 살림에 바쁜 엄마도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친지와 교류했지 자녀들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세계가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믿고 지원하는 것이 가족이 할 일이지 가족 안에서 서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는 발달되지 못한 것 같다.

깊이 있는 감정적 교류를 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한국 가족들은 가정으로 돌아온다. 가정 안에 여러 기능을 하고 있는 어머니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족관계는 어머니를 통하여 연결되고 있는 것 같다. 가족 간의 연대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더 이상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이 떠나게 된다. 여성이 제기하는 중장년층의 이혼은 바로 이러한 현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족 간의 소통을 회복하려면

현재 한국 가족의 문제는 가족 내부 소통의 부재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지나치게 ‘발전’의 모델을 개인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노력해 온 한국 가정은 서로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요구하는 가족관계에 익숙해져 왔다.

그동안 한국 가정은 한국사회 발전에 중요한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이 가족에 대한 감정적 배려를 하지 못하게 한 측면도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 착취적인 면을 갖고 있는 가족의 도구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가족 성원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가족의 도구주의는 개인들의 성공을 위한 것이다. 이 측면은 이타적인 요소까지도 포함된 돌봄(caring)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의 감정까지 포함된 필요성과 욕구에 대한 예민함을 갖추지 않은 도구적 지원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가족은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핵가족으로 살아온 전통이 미흡하다. 이 미흡함이 더욱더 가족 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랫동안 한국 가족은 집안이라는 막연한 범위를 지닌 친척들과 이웃 속에서 서로 교류해 왔다. 직접적인 감정적 대립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고 보인다. 최근에 급증하는 이혼, 가족 내 폭력 등도 고립된 가족 안에 감정적 교류의 단절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 가족 내 여성들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 가족을 위하여 도구적인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 이제 가족을 너무 실제적으로 도우려고 하기보다 무엇을 느끼고 좋아하는지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감정도 식구들에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을 배워야겠다. 이 과정에서 이웃과 친구들을 초대하자.

* 조옥라 소화데레사 -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이다. 2002년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조옥라 소화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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