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7: 신유박해 순교자(서울의 여성 순교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8 ㅣ No.110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상반기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7) 신유박해 순교자(서울의 여성 순교자) - 강완숙 등 8위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과 판결문을 모은 「사학징의(邪學懲義)」는 당시 사회는 물론 초기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신자들의 판결문을 분석해 보면, 천주교인에 대한 당대의 사회 인식과 교회 구성원 · 상황 · 전례 모습 · 신자들의 입교 동기 · 신앙서적 · 기도 · 선교 · 신앙고백 · 교리 이해 · 유배 · 순교 등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학죄인으로 잡혀 순교했던 여교우들은 어떤 죄목과 죄상을 받았을까. 이에 대해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김옥희(안나) 수녀는 △ 이가상경(離家上京,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옴) △ 고혹사학(蠱惑邪學, 천주학에 깊이 빠짐) △ 무혼(無婚, 혼인을 하지 않음) △ 가칭과녀(假稱寡女, 처녀인데도 과부라고 칭함) △ 취회각처남녀(聚會各處男女, 각처 남녀가 함께 모여 집회를 가짐) △ 내방취회남녀(內房聚會男女, 남녀가 안방에 모여 집회를 가짐) △ 유리구로(流離衢路, 거리로 뛰쳐나와 떠돌아다님) △ 수사호(受邪號, 세례명을 받음) △ 수세어주가(受洗於周哥,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 △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 사람들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힘) △ 강사광유각처우민(講邪狂誘各處愚民, 각처에서 어리석은 백성을 미친 듯이 유혹하며 천주학을 강론함) 등 11가지 죄목을 든다.

이같은 죄목을 풀어보면 신유박해를 전후해 여교우들은 시대를 뛰어넘은 신앙 중심의 가치관과 혼인관, 인생관을 갖고 매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여교우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다양한 형태의 신앙생활을 했다. 또 신앙 중심의 혼인관과 인생관을 실현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나아가 신앙 중심의 혼인관은 일부일처제와 부부 쌍방 정절의 의무, 축첩제도 금지, 남녀평등 사상 실현의 디딤돌이 됐다.

특히 혼인을 인륜지대사로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동정녀가 많이 탄생했다는 점은 매우 괄목할 만하다.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여교우는 24위로, 이 중 동정녀는 7위다. 이는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동정 성모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동정의 덕에 대한 흠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동정생활에 대한 사회의 비난을 모면하고자 겉으로는 혼인의 양상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동정의 삶을 산 동정부부가 탄생하기도 했다. 하느님의 종 유중철(요한) · 이순이(루갈다)와 조숙(베드로) · 권천례(데레사) 부부가 그 예다.

신유박해 당시 서울에서 순교한 여성 순교자는 8위다. 이 가운데 첫 손가락은 역시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여인들 가운데 우뚝 선 강완숙은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은 선각자였다. 충청도 덕산 향반 홍지영의 후실로 들어가 전처 소생 아들(홍필주)과 시모를 모신 그는 외적으로는 조선의 어느 여인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신앙이 이 평범한 삶을 완전히 뒤바꾼다. 불이 짚에 붙듯 열심한 애덕으로 신앙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간 그는 아들이 혹형으로 심약해지자 “아들아, 힘을 내어라! 천주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시나니 용기를 내어 천당복을 생각하여라” 하고 권면하며 순교의 월계관을 쓰도록 이끈다. 조선에 살면서도 조선을 뛰어넘은 신앙의 어머니 강완숙은 1801년 7월 1일 41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함으로써 조선 여인들을 일깨웠다.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는 오라버니 심낙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지만, 오빠는 배교한 반면 자신은 1801년 4월 초 19세로 포도청에서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지 못한 채 동정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강경복(수산나, 1762~1801) · 문영인(비비안나, 1776~1801)은 궁녀 신분으로 천주교를 믿어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정광수(바르나바, ?~1802) · 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는 고향 경기도 여주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복음을 전하는 데 전념했지만, 집안 반대로 어려움이 가중되자 한양 벽동으로 이주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룬 사례다. 집 한쪽에 집회소를 지어 미사전례와 모임, 강학을 위한 장소로 제공했고, 이웃 최해두 · 조섭 등과 친교 공동체를 이뤘다. 그러나 신유박해로 부인 윤운혜가 먼저 체포돼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고, 남편 정광수는 이듬해인 1802년 1월 29일 고향인 여주로 끌려가 순교했다.

이 밖에 교회 서적과 성물을 숨기다 순교한 한신애(아가타, ?~1801)와 ‘천주교 매파’로 불릴 정도로 적극 전교활동을 편 김연이(율리아나, ?~1801)는 1801년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과부였지만 교리 강습과 성교회 서적 보급 등을 통해 전교에 헌신한 정복혜(칸디다, ?~1801)도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19일, 유은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


89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