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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유요한 · 이루갈다 동정부부의 현대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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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2 ㅣ No.1111

유요한 · 이루갈다 동정부부의 현대적 조명


‘부부동정’이라는 말의 모순

옛날 어머니의 삶은 고달팠다. 어머니는 천형(天刑)의 이름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절구통에 방아를 찧어 밥을 해야 했고, 농사일에 피죽이 된 몸을 쉴 겨를도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희미한 등잔불을 켜놓고 잠을 쫓으며 베틀에 앉아 사랑하는 가족들의 입성을 장만 할 베를 짰다.

믿음의 어머니들은 믿음살이의 활력을 돋구어 주는 ‘천당노래’를 부르며 심신의 고달픔을 달랬다. 믿음살이의 노래는 오매불망 하늘나라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하늘나라를 향하여 비상하려는 간절한 소망의 시(詩)였다.

조상들이 ‘천당노래’라고 불렀던 그 시는 교육 수단이 없는 시절, 더구나 글을 모르는 아녀자들에게 교리와 믿음의 가르침을 정신에 박히도록 의식화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선생이 없었다. 여교우들은 신앙공동체가 아낙네들의 ‘베틀노래’를 본떠 지은 ‘비단강론’을 구성지게 불렀다.

짜사이다 짜사이다 이 비단을 짜사이다 /
성덕으로 틀을놓고 애덕으로 잉아걸어 /
짜고짜고 다짠후에 누구누구 주산인가 /
희고도 곤비단은 동정자나 주사이다 /
붉고도 곤비단은 치명자나 주사이다 /
푸르고도 곤비단은 수절자나 주사이다 /
검고도 곤비단은 지옥자나 주사이다 (생략)

꽃마다 그 꽃이 상징하는 뜻의 꽃말이 있듯이, 신앙의 조상들은 색깔이 상징하는 뜻에 맞는 삶을 살고자 비단을 짜듯이 살았다. 믿음살이의 베틀은 성덕(聖德), 곧 영원한 생명을 마련하기 위한 사랑과 봉사의 도구였다. 믿음살이는 하느님 사랑을 씨실로 잉아 걸고, 이웃사랑을 날실로 하여 곱디 고운 비단을 짜는 삶이었다. 하느님은 깨끗한 마음으로 순결을 지키며 일생을 바친 동정자에게는 희고 고운 비단을 주시고, 피흘려 하느님을 사랑한 순교자에게는 붉고 고운 비단을 주시고,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절개를 지키며,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던 수절자(守節者)에게는 푸르고 고운 비단을 주시고, 어둠의 자식에게는 검고 고운 비단을 주실 것으로 알았다.

이순이 루갈다는 동정자의 상징인 흰 비단, 순교자의 상징인 붉은 비단, 수절자의 상징인 푸른 비단을 한꺼번에 받았다. 아니 유 요한과 이 루갈다는 ‘비단강론’의 노래말처럼 둘이 어우러져 비단을 짜듯 살았다는 것이 옳다. 두 사람은 성덕을 믿음살이의 틀로 하고, 완전한 덕의 삶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 사랑을 씨실로, 이웃사랑을 날실로 하여 비단을 짜듯 살았다.

사랑은 믿음살이의 혼불이었다. 이순이는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불태우기까지 깊은 믿음, 불같은 사랑, 확고한 희망의 풀무질을 하였다. 그래서 언니와 올케들에게 “믿음 · 소망 · 사랑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덕이요, 이 세 덕을 진실되게 실천하면, 다른 덕들은 자연히 따르게 된다”며 세 가지 덕으로 고난의 삶을 극복하도록 간곡히 빌었다.

사람은 사상 · 감정 · 생각 · 느낌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쌨다. 그 예의 하나가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삶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부부 · 동정 · 순교라는 뜻을 스스럼없이 한마디로 사용하고 있다. 말의 뜻대로라면 성적(性的) 결합인 ‘부부’와 ‘동정’을 한 단어로 묶어 사용하는 것은 억지요 모순이다. 사실 요즘 학계의 일각에서 ‘부부동정’이라는 명칭에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어떻게 부르는 것이 온당할까? 어디 안성맞춤 말이 없을까? 그것이 과제이다.


수양된 인격에 쌓은 믿음살이

천주교를 박해한 위정자들은 목숨만 죽인 것이 아니라 순교자가 살았던 족적을 뿌리채 뽑아 없앴다. 이순이의 삶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변변한 자료가 없다. 1858년 다블뤼 주교는 이순이의 생애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아주 빈약한 자투리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859년 다행히 이순이의 ‘옥중편지’를 발견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는 조선 순교자들의 보석인 이 소중한 자녀의 생애를 황금글자들로 묘사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감동적인 편지들이 보충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순이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이곳 저곳에서 자료를 모아 엮을 수밖에 없고, 자료의 행간에 숨겨진 내용을 찾아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중철과 이순이의 믿음살이를 말할 경우 이순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유중철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이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서로 밀접하므로 이순이를 알면 유중철을 아는 것이 된다.

순교자라고 해서 모두 성인으로 존경해야 한다면 그것은 망라주의(網?主義)이다. 순교자의 믿음살이는 신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사표(師表)됨은 물론 생애를 서술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한다. 이순이의 삶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지체높은 양반 신분이면서 부부동정이라는 금욕적인 희한한 부부살이를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언행이 아름답고, 정신과 행실이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이순이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집안이었다. 실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은 그의 9대 할 아버지이며, 실학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은 진외할아버지이고, 다산 정약용의 스승이었던 녹암 권철신은 친외삼촌이다. 권철신은 재주가 뛰어나고 슬기로우며, 성품이 어질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재주와 덕(德)을 겸비하였었다. 그래서 성호선생은 권철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다. 이순이의 집안은 출세를 외면하고 인간다운 인간, 이상적인 인간 곧 성인(聖人)이 되도록 인격 수양에 힘쓰던 깨끗하고 이름있는 청족(淸族)이었다.

이순이의 아버지 이윤하(마태오, 1793년 사망)와 어머니 권조이의 자녀교육은 외삼촌인 권철신의 모범적인 행실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윤하는 일찌기 정약전 · 이승훈 · 김원성과 굳은 우정을 맺고 손위 처남인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권철신은 평소 지식을 얻기 위한 글공부에 앞서 바람직한 인간이 되도록 인성교육을 강조하며,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였다. 다산 정약용은 스승인 권철신의 모범적인 삶을 높이 칭찬하는 글을 역사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권철신은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실천적인 학문에 힘썼고,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의 뜻에 맞도록 행동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데 힘을 썼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히 모여 지내도 한 품에서 자란 형제들처럼 아주 화합하여서 그 집에 한 달 정도는 지내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녀종들이며 논밭은 물론 곳간에 저장해둔 곡식을 형제끼리 내 것, 네 것 조금도 구별짓지 않고 함께 사용하였다. 권철신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비록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종들에게까지 골고루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양에 친척과 이웃이 감화됨은 물론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권철신을 우러러보았다. 그래서 이름있는 선비들까지 권철신의 표양을 사표로 삼고, 자식들을 권철신의 문하에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순이는 친정에서 받은 교육을 시집생활을 하며 실천하였다. 이순이가 남긴 단장(斷腸)의 ‘옥중편지’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순이가 인간됨의 도덕성을 가꾸고 기르는 근원인 효(孝)의 책, ‘효경’의 정신에 깊이 젖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이는 인성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믿음살이를 쌓아갔다.


절제된 사랑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흔히 이순이가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이 성체를 받아 모신 후 하느님과 일체가 된 자기 몸에 맞갖게 살고자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옥중편지’를 읽어보면 이미 어려서부터 동정생활을 결심하였었다. 이순이와 유중철은 1798년 9월 시부인 유항검과 신희 앞에서 동정서약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며 어려서부터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만남은 두 사람의 소원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기에, 저희 둘이 주님께 감사하는 길은 죽음으로써(순교) 신앙을 지켜 주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이순이는 올케와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가장 마음으로 복종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요한 오라버니이고 여자로는 아가다 성녀”라고 하였듯이 아가다 성녀를 모범으로 삼았다. 하느님과 이순이 사이의 중재자는 아가다 성녀였고, 동정성소를 결심하게 해준 등불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신도 가정에서 압수된 서적 중에 ‘아가다 성녀전’이 있었다. 이순이는 일찍이 아가다 성녀의 전기를 읽고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이다.

아가다 성녀는 3세기에 로마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아가다는 시칠리아의 권세와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고자 동정생활을 결심하였다. 시칠리아 총독은 아가다에게 청혼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오기가 발동하여 아가다를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명목으로 체포하고는 급기야 사창가로 보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가다의 동정을 지켜주셨다. 총독은 아가다에게 갖은 고문과 젖가슴을 도려내는 혹형을 가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가다는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주셨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를 바친 뒤 숨을 거두었다.

1801년 박해 때 최해두는 유배지인 경상도 흥해에서 ‘자책 : 스스로 꾸짖음이라’는 참회록을 썼다. “옛 성인이 고행하신 것을 보면 홀아비 · 과부의 정결도 있고, 부부가 잤으나 서로 언약하여 남매같이 지내자며 동정을 지켰고, 결혼하지 않고 동정남 · 동정녀로서 정결을 지키며 어렵게 몸 닦음을 이룬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무엇이기에 마음을 방종하여 하고 싶은 그릇된 일을 다하면서 몸닦음을 이루겠다는 말인가?” 이처럼 동정은 덕을 닦는 수행의 모범으로 여겼다.

이순이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정 많은 여인이었다. 가족들을 향한 인간적인 애정이 철철 넘쳤고, 솔직히 말했듯이 유중철에 대한 격렬한 욕정으로 몸부림쳤던 몸이 뜨거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순이에게 성(性)은 ‘나’에 대한 애착, 소유욕, 자기가 꾸미는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집착을 뜻하였다.

갈등을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었다. 유중철을 향한 격정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이었다. 이순이는 사랑하는 유중철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끓어오르는 격정의 힘을 자기 본능을 절제하는 힘으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격정은 부질없는 욕망과 육체적인 쾌락의 불순물을 태우는 활화산으로 변화하였다. 이순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식이 되어 저 부모이신 하느님을 저 지경에 이르도록 하고서 또 죄를 지어 거룩한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없다고 뉘우치며 욕망과 쾌락의 몸뚱이를 하느님 사랑으로 소각하였다. 이순이는 유중철과 절제된 사랑을 나누며 삶의 깊고 깊은 부부사랑의 맛을 느꼈다. 무한한 본능의 욕망을 비운 그 자리를 아무리 품어내도 마르지 않고, 아무리 가슴에 안으려도 다 안을 수 없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사무치게 그리운 님이신 하느님과 그 나라를 사랑하며 살려는 열정으로 채워 욕정을 절제할 수 있었다. 이순이에게 절제는 곧 자기극복이요, 사랑이요, 봉헌이요, 자기 삶을 은총으로 밀고 가는 힘이었다.


끝까지 간다

이순이가 하느님을 이해한 해법(解法)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몸으로 배워 익히고 실천하였던 효(孝)의 마음이었다. 효를 신앙 안에 승화시켜 하느님을 이해하고 부모로 느꼈다. 사람의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으로 부모 몸이 내 몸이요 내 몸 안에 부모가 계시듯, 이순이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나서 하느님이 내 몸 속 안에 계시고 자신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정다운 분이며 체온을 느끼고 살 냄새나는 부모였다. 이순이는 성체를 모시고 나서 하느님이야말로 나에게 피와 살을 주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순이는 순교를 생명을 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행위로 여겼다.

그러한 체험이 동정생활을 결심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과 생각 속에 분심 잡념이 끼어들지 않고 모든 삶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한곳으로 향하여 살 수 있는 환경을 결정하도록 재촉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사회관습상 어쩔 수 없이 부부동정이라는 생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순이는 신학적인 말놀이 보다 행동으로 예수께서 걸으신 길을 따르고자 모든 힘을 기울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섬기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의 효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유교의 효도는 몸을 닦고 덕을 세워 사람의 도리를 실행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하여 부모의 이름을 먼 뒷날에까지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순이는 유교의 효행을 신앙에 옮겨 완덕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육체적인 욕망과 세속의 이익과 명예와 힘만을 탐하는 속물근성을 이겨내고자 극기생활을 하며 내공을 쌓았다. 그리고 믿음 · 소망 · 사랑의 덕을 실천해서 삶의 질을 변화시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딸이 되고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순이는 이 세상에 최후의 가치와 목적을 두지 않았다. 누구나 빠지기 쉬운 현세주의와 속물근성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였다. 그래서 언니와 올케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돌아보아도 마음 둘 데가 없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하늘나라 뿐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순교를 목전에 두고 있는 오빠 이경도와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잠겨있을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된 세상으로 생각하셔요”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죽고 사는게 어디 인간의 힘으로 될 일인가.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그분 뜻에 맡기도록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 말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더욱 진실하였다.

이순이는 마음과 생각이 하느님과 합치되면서 하늘나라의 맛이 깊어갔다. 지상의 부모께 대한 효도는 천상의 부모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효도에서 완성된다고 확신이 깊어졌다. 순교는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른 마지막 효행이었다. 갈대 같은 인간의 의지로 순교가 가능할까? 하느님 뜻을 끝까지 따르는 것도, 순교도 모두 은총이다. 글쟁이의 말이 아니다. 이순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며 믿음살이의 체험을 남겼다.

[쌍백합 창간호, 2003년 여름호,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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