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2 ㅣ No.1113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


1996년 겨울이었다. 역사학도로 입문한 지 17년만에 박사학위심사를 마치게 되어 기쁨에 들뜬 나에게 지도 교수님께서는 한 무더기의 한문자료를 내주시며 번역해보라고 권유하셨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편찬한 사료 가운데 가장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승정원일기’에서 뽑은 신유박해 순교자 관련 사료로서, 이는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1997년 봄 전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세냇가 아파트 골방에 파묻혀 부족한 공부를 한탄하며 순교자 사료의 번역과 씨름한 지 3년만에 ‘신유박해 자료집’ 3권의 번역을 아쉬움 속에서 끝맺게 되었다. 200자 원고지 4천 518매에 달하는 번역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한 구절의 글과 한 집안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 새벽 ‘종하생종(種下生種)’이라는 부분에서 번역이 막히었다. “씨앗이 아래로 떨어지어 씨앗을 낳다.” 무언가 어색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성경 한번 제대로 못 읽어 본 나였지만 뇌리를 스치는 한 마디가 생각났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3代의 희생기록 남아

신유박해(1801, 순조 1)를 통해 양반사족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많은 집안들이 몰락하였다. 그런데 권철신,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정약종 등 평소 익히 들어온 유명한 인물들보다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전주의 유항검 집안이었다. 적어도 신유박해 기간의 ‘승정원일기’ 기록상, 한 집안에서 남녀노소 3대의 희생 기록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유항검 집안이었다. 유항검의 부인, 아들, 며느리, 동생, 제수의 이름 속에서 나는 ‘이순이’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처럼 부유했던 한 집안을 모두 죽음의 길로 이끈 힘은 무얼까”라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신유박해 자료집’의 완성과 함께 일단락 될 것만 같았던 이순이에 대한 관심은 이후 부족한 공부를 조금이나마 메우기 위해 천호성지 문턱에 자리한 호남교회사연구소를 드나들게 되면서 더욱 커져,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천주교 전주교구사’를 필생의 역작으로 남기신 김진소 신부님과, 묵묵히 신부님의 작업을 뒷바라지해오신 양희찬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내겐 기쁨이었다. 게다가 두 분께서는 필사본으로 전해온 이순이 루갈다와 그 남매의 편지를 여타 판본들과 면밀히 검토 분석하고, 나아가 누구나 읽기 쉬운 우리 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상당부분 진행시켜 놓으신 상태였다. 천주교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나는 두 분의 특별한 배려로 이 작업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천호동 골짜기에 그윽한 아카시아 향기, 무더위를 가르는 연구소 뒤뜰의 대나무 소리, 아름다운 다리실 마을의 고운 단풍, 늠름한 천호산의 은빛 설경을 즐기는 동안,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는 200년 세월을 건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되어갔다. 아침에 시작한 세미나가 밤까지 가기 일쑤였지만, 돌이켜보면 내겐 그야말로 모두가 뜻깊은 시간이었다.

유학적 풍토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었다. 처가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덕분에, 우리 집 방 한구석엔 장모님께서 결혼 선물로 주신 ‘믿음 · 소망 · 사랑’이라는 예쁜 자수액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글에 담긴 의미를 단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그 참뜻을 느끼게 되었다. 이순이 루갈다에게 있어 믿음은 죽음을 초월한 것이었고, 소망은 나 자신의 행복만이 아닌 더불어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사랑은 육신과 시공을 뛰어넘는 고결한 것이었다.


죽음을 기쁨으로 여겨

이순이 루갈다는 순교를 하느님이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고, 단 한번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을 서너 몫으로 나누어 한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달라고 유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더불어 삶을 실천하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갖은 유혹을 뿌리치고 하느님과의 약속한 동정생활을 꿋꿋이 함께 지켜낸 남편 유중철 요한을 참된 벗으로 섬기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하길 간절히 기원하는 진정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유교적 전통에서 인간의 도리로 강조하는 효도[孝] · 우애[悌] · 충성[忠] · 신의[信]는 이순이가 그토록 간절하게 외치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받들던 믿음 · 소망 · 사랑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굳이 다른 점을 들자면, 하느님의 나라를 믿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효성과 우애 그리고 믿음을 실현하고픈 이순이 루갈다의 간절한 마음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살아 생전 변변하지 못한 자식이었지만 순교의 열매를 맺는 그날이면, 어머니는 자랑스런 자식을 두었다고 여길 것이고 자신도 떳떳한 자식이 될 것”이라고 이순이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육신보다 마음이 더 중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육신을 정성껏 모시는 것보다는 마음을 편히 모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이승의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달라고 두 언니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있었다. 특히 “정신이 흐려진 어머님께서 혹시 일을 그르치더라도 사리를 들어 따지지 말고, 설움을 감춘 부드러운 얼굴로,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고 때론 우스개 소리도 하며 잘 보살펴달라.”는 이순이의 말은, 늙으신 아버님이 계시는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이렇듯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는 시부모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 남편을 섬기는 정성, 형제간의 우애와 가족간의 화목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향한 은혜로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성과 신의는 하느님에 대한 영원한 믿음과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믿음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서러운 일이 많고도 많아 글로 쓰려고 하면 소나무 대나무도 말라버릴 정도”라는 그런 딱한 처지에서, 하느님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과 주위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안은 이순이를 보노라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한결같은 믿음 놀라워

이순이 루갈다와의 만남은 나 자신의 삶과 일상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하였다. 내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오늘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소망하며, 어떻게 믿고 있는가. 나는 이제 내일 누구를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소망해야 하며, 어떻게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가. 또한 하루하루의 일상에 대한 고찰은 반성으로 이어져 나를 더욱 짓눌렀다. 나이 드신 아버님에 대한 아들로서의 효도, 가족에 대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의무,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헌신을 바탕으로 한 더불어 사는 삶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새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다짐하였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흔히 지적하는 물질만능주의, 인간성의 상실, 상호신뢰의 실추, 가족의 해체, 일회성 사랑 등과 같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를 떠올리면서, 이순이 루갈다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직업이 역사선생인 탓인지 그간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여성상과 이순이를 자연스럽게 비교해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사극이나 글을 통해 문정왕후, 장희빈, 민비와 같은 왕실 여인네, 신사임당, 허난설헌, 매향 등과 같은 여류 시인, 성춘향, 심청이, 논개와 같은 정절과 효성의 여인상을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무 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한 이순이 루갈다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고귀한 삶의 의미 일깨워

고귀한 삶을 살다간 이순이 루갈다는 200여 년의 세월을 건너고, 천주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으로 빛과 소금처럼 다가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친근한 이웃집 누이 이름 같은 이순이는 자신의 권력과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지도, 한 남정네와 나눈 가슴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시로 읊지도 않았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을 모르는 이가 없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건만, 봉건신분사회의 질곡을 벗어나 모든 사람이 평등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피의 제단에 바친 우리의 이순이는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잊혀졌던 것이다.

이순이 루갈다는 언니에게 보낸 편지의 끝 부분에서, “자신은 착하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권했습니다. 참으로 저야말로 길가의 장승처럼 사람들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도 자기는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맺고 있다. 겸손하고 착한 품성의 이순이는 이렇게 편지를 끝맺고 있는데, 참으로 이순이 루갈다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에게 말없이 갈 길을 가리켜주는 장승, 그런 장승일 것이다

[쌍백합 창간호, 2003년 여름호, 변주승(전주대 교수)]


1,18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