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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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프랑스 순례: 앵베르 주교의 고향 마리냔느를 지나 마르세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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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1094

[영원을 향하여 시간을 걷다 - 프랑스 순례] 그들의 출항 그리고 우리 순례의 시작

앵베르 주교의 고향 마리냔느를 지나 마르세유로


천주는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찬미를 받으실지어다.
내 피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 내 자녀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을 보는 것에서 느끼는 행복은, 그들 있는 데로 오기 위하여 당해야 했던 고생을 잊게 합니다.
참말로 천주의 의도는 사람의 의도와 같지 않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 앵베르 주교의 서한 중에서(1838년 11월 24일자)

1831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회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된 프랑스와 조선교회의 인연을 따라 2012년, 몇 분 선교사의 고향 마을을 순례하였다. 역동적인 한국교회 신자들과 산전수전을 겪은 프랑스 교회의 현재가 만나는 풍경은 종종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며칠, 잃어버린 고향 방문 같기도 했던 프랑스 마을 순례의 자취를 나누고자 한다.


프랑스에 간다고 생각하자 소녀처럼 마음이 콩콩 뛰었다. 오래전 기억 속에 먼지를 뒤집어쓴 상념들이 폴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프랑스는 얼마나 매력덩어리 나라였던가. 그러나 늘 그렇듯 현실이 기억과 일치하거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건 아니었다.

프랑스에 들어선 다음날 앵베르 주교의 고향을 찾아갔을 때부터 이미 달콤한 환영은 사라지고, 이백 년 전 알지도 못하는 땅을 향해 무모한 선택을 한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선택과 결단의 순간들에 조금씩 감정이입이 되고 있었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교구장 앵베르(Imbert, Laurent-Joseph-Marius, 1796-1839년) 주교의 고향 마리냔느(Marignane)는 프랑스 남부 해안의 마르세유 가까이 있었다.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앵베르 주교 기념 성당’에서 순례의 첫미사를 드렸다.

앵베르 주교는 집안에서 최초로 글을 깨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너무 가난해서 학교라곤 꿈도 꾸지 못하던 그가 일곱 살까지 양치기소년으로 지내다 어느 날 성당에 가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고, 성실함과 명석함 덕분에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24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토록 힘겹게 배운 그가, 비록 사회 분위기가 열악해졌다고는 해도 그나마 신분이 보장된 사제직의 안온을 버리고 조선으로 향한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길이었다.

▶ 1789년 촉발된 프랑스혁명은 삶의 모든 근간을 흔들어버렸다. 그중에서도 가톨릭교회의 혼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수도원은 폐쇄되고 교회 재산은 몰수됐으며,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학살당하고 신자들은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순교 아닌 순교의 시대였다. 5세기경 클로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후 ‘가톨릭교회의 맏딸’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프랑스 교회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1796년 태어난 앵베르 주교는 세례조차 숨어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개양귀비 예쁘게 피어있는 어디에도 그가 세례를 받았다는 물방앗간의 자취는 없었다. 온 나라가 초토화되던 시기에 듣도 보도 못한 조선 땅에 선교사로 가 순교한 이들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1984년 시성 후에야 비로소 앵베르 범세형 라우렌시오 주교를 알려는 공부와 모임이 생기고, 성인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앵베르 주교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칼라(Calas)의 성당에도 가보고, 훗날 첫미사를 드린 카브리에 성당에도 찾아갔다. 혁명의 와중에도 기적같이 살아남은 시골마을 성당. 참 귀한 곳이었다.

▶ 마르세유는 전쟁 때문에 도시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유서 깊은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원전 600년경부터 그리스인들의 도시가 있었지만 이곳은 모든 지중해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다. 마르세유 시가를 감싸 안은 석회암 언덕 위에 세워진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사는 마르세유라더니 이곳에서 만나는 얼굴 역시 참 가지각색이었다. 성당 안은 황금빛 모자이크와 줄무늬로 장식한 아치와 기둥들이 아늑한 숲 같아서 금세 평온해졌다. 무수한 뱃사람들이 항해를 떠나기 전 ‘보호자이신 성모(Notre Dame de la Garde)’께 의탁하던 곳. 삶과 죽음을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이 생각하던 곳이었다.

지중해 바람이 언덕 위로 스치곤 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출항할 때 가족들은 이 높은 언덕에서 배가 멀리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이별을 고했다. “… 이 생에서는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파견가 중에서). 노래하며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그토록 오래 지켜봐야 했던 그 순간, 너무나 긴 배웅, 너무나 힘든 이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알다시피 그들의 뒷모습이 ‘죽으러 가는’ 것만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말 그대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이들의 출항이었다. 그들은 격랑의 또 다른 바다에 배를 띄웠던 거다. 영원을 향한 바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와 청춘을 사로잡았던 그 바다에.

그리고 바로 그 바다를 앞에 두고 전교지였던 조선의 신자들의 후예들이 순례의 첫발을 내딛었다. 새로운 출발에 축복을 청하며.

* 이선미 로사 -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신자.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 성지를 순례하다 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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