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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 영성: 세상에 천막을 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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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9 ㅣ No.801

[생태 영성] 세상에 천막을 치신 하느님

 

 

옛 이야기 하나

 

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돌아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애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서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성탄 이야기 하나 - 누추한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고 전한다. 원문에 충실히 직역을 하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가 된다. 지극히 높으시고 위엄하신 분,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손수 피조물(살)이 되시어, 창조계에 거처를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존엄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물질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당신이 비천한 모습으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거처를 마련하심으로써 하느님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하느님의 집, 성령의 궁전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님의 성탄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곳으로 변화된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활동하던 1세기 말경에는 영지주의(Gnosticism) 사상이 만연하여 그리스도교를 위협하였다. 영지주의란 사람이 ‘영지(靈知)’, 곧 영적인 지식으로 구원된다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지식을 신앙보다 우위에 두었다.

 

이들은 영혼세계와 물질세계를 화합할 수 없는 상극으로 구분하는 영육(靈肉) 이원론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영혼의 감옥인 육체로부터 해방될 때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강조하는가 하면, 영혼만이 중요하므로 육체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하여 윤리적으로 퇴폐적인 생활을 즐기기도 하는 성속(聖俗) 이원론의 행동규범을 따랐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육체’를 택하시고, ‘세상’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고 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 사상을 단칼에 부정한 것이다. 희랍어에는 몸을 뜻하는 단어로 ‘소마(σωμα)’와 ‘사륵스(σαρξ)’가 있는데, ‘사륵스’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성령과 반대되는 개념(갈라 4,23; 필리 3,3)으로 쓰이며, 헬레니즘의 언어에서 가장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가치를 상징하는 말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가장 비천한 것과 가장 가치 있는 하느님이 하나임을 보여줌으로써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한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만물을 화해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이다(콜로 1,19-20).

 

 

육화 - 성사와 생태 영성의 원리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뒤, “보시니 좋다.” 하시고, 몸소 창조물이 되시어 세상 속에 거하심으로써 창조물(자연)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선한 것이다. 그로써 물질은 영적인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예수라는 인격체 안에서 그것은 극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인간의 형상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함을 드러내신 원성사(原聖事)이시다.

 

하느님의 육화로 하느님의 창조물들은 하느님을 알려주는 거룩한 표지가 되었다. 교회는 창조물들과 인간의 행위들을 신과 만남의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다.

 

세례성사 때 물 속에 잠기거나 이마에 물을 적시는 경험, 세례와 견진과 성품 성사에서 사용되는 크리스마(축성 성유)를 바르는 느낌과 향취, 고해성사에서의 안수와 병자성사와 성품성사의 기름을 바르며 인간의 손을 접촉하는 것,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맛보는 것, 혼인성사에서 사랑의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모든 행위들은 강력한 인간의 종교적 체험일 뿐 아니라 신적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들은 그리스도교 전례의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표징들로 사용된다. 우리의 기도와 하느님 용서를 나타내는 분향,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임을 상기시키는 양초의 밀랍, 승리의 표지가 된 십자가 나무, 우리를 성인들의 통공 속에서 살도록 부르는 성상과 스테인드글라스, 악기와 회중이 함께 부르는 성가 소리들…. 이 모든 전례의 요소들은 육화에 대한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생태적이며 경제적인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고자(‘임마누엘’, 마태 1,23 참조) 세상을 집(skhnow)으로 삼으셨다. 희랍어에서 집을 뜻하는 또 다른 말은 ‘오이코스(οικο?)’로 생태학(Ecology)의 어원[Eco]이 된다. 생태학은 하느님이 거처로 마련하신 하느님 집의 생리에 대한 학문인 것이다. 그 집을 운영(Economy - 경제)하는 하느님의 방식을 하느님의 섭리(Economy)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섭리(창조질서)에 따른 자연은 긴밀하게 짜인 먹이사슬에 따라 한 톨의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순환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최초의, 가장 완벽한 경제학자라 부를 수 있다.

 

하느님의 집을 대신하여 관리하는 우리 인간은 그 집을 파괴하고 낭비하는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Economy)에 입각하여 알뜰하게 경제적으로(Economy)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개발론자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생태계의 파괴는 어쩔 수 없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자연을 파괴하여 이루어내는 경제성장은 거시적으로 보아서는 결국 마이너스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미 밝혀지고 있다. 자연의 파괴와 남용으로 생긴 지구 온난화는 여러 가지 기상이변으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경제성을 따지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최초의 경제학자인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곧 가장 생태적인 것이 가장 경제적인 것이며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성탄 이야기 둘 -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구유는 말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먹이를 담는 그릇이다. 아기 예수께서 그곳에 누워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먹히는 존재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표징임을 일깨워준다(요한 6,51; 루카 22,19 참조). 하느님이 물질이 되시어 창조계 안에 사신다는 것은 하느님이 생물학적 그물, 곧 서로 먹고 먹히는 생명의 그물, 상호연관성의 생태계 원리에 참여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들처럼 같은 공기를 마셨고, 같은 땅에서 자란 음식을 먹었으며, 같은 빗방울로부터 온 물을 마셨다. 인간 육체의 자연적 생물학적 과정은 인간 예수에게도 틀림없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하는 것과 똑같이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셨다. 지구생태학의 부분이 되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육화는 독립적인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육화는 인간의 한 전형이며 생물학적 창조물들의 ‘덧없는 육신’의 한 사례로서 예수님 안에서 확장된다. 곧 나자렛 예수를 말하는 육은 예루살렘에서 난 그 아기뿐 아니라 인류, 동물, 그리고 물질적인 원료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물들은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8,18-23).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생태 영성

 

영지주의 이후에도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카타리파(Cathari), 얀세니즘(Jansenism) 등의 이단 사상들이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이단들에 대해 단죄를 하였지만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은 부지불식간에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금욕, 육체와 세상을 부정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내세의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그리스도교 안에는 남아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육화로 이 세상은 하느님의 거처로서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현 장소가 되었다. 영원한 생명, 구원, 하느님 나라의 삶은 저세상에서만 체험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고 맛보지 못하면 영영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있으면서 창조물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삶의 순간순간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생태 영성의 삶은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은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루카 20,38).

 

성탄은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을 기억하는 연례적인 축하 파티가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로 거룩하게 된 세상을 거룩한 것으로 지켜나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본분을 일깨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 이동훈 프란치스코 - 제천 남천동성당 주임신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생태신학을 전공하였다. 생태영성연구원 공동대표이다.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 이동훈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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