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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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십자가의 여인 에디트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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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5 ㅣ No.1191

[성인의 삶에 깃든 말씀] 십자가의 여인 에디트 슈타인

 

 

진리에 대한 추구

 

가르멜 수도회의 성인 중에 이 시대와 가장 가깝게 산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성녀가 있습니다. 성녀는 1891년 독일의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지역)에서 독실한 유다교 집안의 열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영민했으며 사람과 사물에 대한 본질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삶에 대해 깊고 다양한 물음을 던지며 씨름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여성은 누구인가? 여성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에디트는 이런 실존적 · 형이상학적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자신의 삶을 투신할 수 있는 숭고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성녀가 그 후 실존적 결단을 내리고 앞으로 다가올 삶의 여정에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는 데 근본 동기가 됐습니다. 성녀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며, 이는 성녀가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한 삶의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후설의 문하에서 현상학을 배우다

 

대학 시절 에디트가 고민했던 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와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에디트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학창 시절, 에디트는 공부만이 아니라 여성 운동을 비롯해 자선 단체에서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물음, 삶에 대한 물음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자, 성녀는 심리학에서 철학으로 학문적 방향을 틀었습니다.

 

결국 에디트는 2학년을 마치고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문하에서 당시 새로운 학문으로 떠오르던 현상학을 비롯해 철학적 인간학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에디트는 이 두 분야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 문제들을 심도 있게 파헤쳤습니다. 그 와중에 유럽을 휩쓴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에디트는 학업을 중단하고 간호사로서 적십자 산하 야전병원에서 봉사하며 고통을 겪는 이들과 연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에디트는 학업에 정진해 1916년 후설이 강의하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감정 이입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독일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처음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 후 성녀는 약 2년 동안 후설의 조교로 연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하다

 

철학자인 에디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 후설의 조교로서 성녀의 절친한 벗이자 조언자인 아돌프 라이나흐의 죽음을 겪으면서였습니다. 당시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했는데, 에디트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그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아내 안나 라이나흐를 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처음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동시에 안나의 부탁으로 라이나흐의 유고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닌 삶의 가치관과 신앙관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에디트가 중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1918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을 접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에디트는 밤새 이 작품을 읽고 그동안 자신이 현상학과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 추구한 진리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1922년에 에디트는 쉬파이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2년부터 1933년까지는 철학자이자 고등학교 교사로서, 여성 인권운동가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다양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다

 

그러나 1933년부터 불어 닥친 나치즘의 영향으로 사회가 혼란에 휩싸이고 특히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에디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스테르처럼 유다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자 십자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앞서 《자서전》을 통해 성녀 데레사와 만난 일과 이 선택이 에디트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디트는 1933년 쾰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라는 새 이름을 수도명(修道名)으로 받아 가르멜 수도자로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나치의 유다인 박해는 더욱 심해져 1938년에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쾰른 수녀원에서 에디트를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로 피신시켰습니다. 1940년에 나치는 네덜란드를 침공했으며 유다인 박해를 대대적으로 단행했습니다. 결국 1942년 8월 2일 에디트는 언니 로사와 함께 붙잡혀 8월 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가스실에서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 후 에디트는 1987년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습니다. 1998년 10월 11일 시성됨과 동시에 성 베네딕토, 성녀 카타리나와 더불어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 칭호를 받았습니다.

 

* 윤주현 신부는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대구 가르멜 수도원 원장,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과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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