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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찾는 신앙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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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6 ㅣ No.1197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찾는 ‘신앙 감각’

 

 

세상을 읽는 ‘감각(sense)’이 있다. 운동이나 예술 영역에 타고난 감각, 또는 숙련된 감각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다양한 표징을 읽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감각이 누구에게나 있다. 보통 ‘센스(sense) 있는 사람’이란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해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판단하는 사람이다. 반면 ‘센스 없는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일어나는 일의 정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매여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감각은 언제나 내가 아닌 타자와 소통하고 교감하여 일깨워지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제 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된 후 신자들과 만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적 교감과 소통이다. 신자들은 본당 신부가 새로 부임하면 신부의 성향과 관심사, 전례와 사목 방향에 주목한다.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강론 내용, 단체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신부가 교회와 세상을 이해하는 감각을 판단하곤 한다. 본당 신부가 된 후 가장 큰 변화는 혼자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었다. 또 신자들과 눈길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으면서 신자들의 관심과 교회 생활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지낼 때 다른 신부님들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신학생들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운동하는 생활 공동체를 이루며 가졌던 감각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인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는 감각을 갖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해 왔는지에 따라, 그리고 나의 인격을 성장시켜 주는 좋은 멘토와 친구,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책과 조언, 삶의 아픔과 고뇌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는 감각을 갖게 된다. 세상과 얼마나 소통하고 교감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읽는 감각도 달라진다. 외톨이로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자아를 의식하며 타인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 자세는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센스를 키우는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처럼 지식이나 감성만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는 ‘공존지수(NQ: network quotient)’가 오늘날 중요한 삶의 척도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계 속에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때 감각은 ‘이기적 감각’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동물적 감각’이 세상을 지배할 때 인간 영혼을 감싸고 있는 영적 감각,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적 소통 능력과 감수성은 퇴락해 버린다. 소통의 부재나 이기적 탐욕으로 인한 소유와 경쟁의 세속적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질수록, 사회는 세상의 표징 속에 숨겨진 영원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세속화 현상’을 보인다. 지난해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신앙의 해’는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가 상대화하고 세속화한 문화에 밀려 약화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경고다.

 

‘신앙의 해’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 감각을 회복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되찾으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창세 2,7) 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세상에 매몰되어 살아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안에 담겨진 하느님 생명의 숨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호흡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감각은 하느님 위에 굳게 서는 ‘신앙 감각’이어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감각은 우리 영혼의 고향, 곧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 위에 굳게 서는 믿음의 감각이어야 한다. 믿음은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자신의 기초를 세우는 것,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떠나서는 참된 생명의 숨을 쉴 수 없다는 고백이다.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영의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고 세상에서 내가 살아온 이유와 살아 갈 이유를 찾게 해 주는 영적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 감각을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발견하고 성장시켜 나간다. 본당 신부가 되고 나서 깨달은 점 가운데 하나는 누구에게나 존경과 인정을 받는 사제의 삶이 아니라, 내 생각에 반대하고 내 행동과 말을 구설수에 올린 이들과, 나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통해 오히려 내가 성장하고 세상을 읽는 감각을 새롭게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드러난 참된 하느님의 표징, 즉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숭고함을, 가난과 억압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죄악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꽃피도록 헌신하는 아름다움을 식별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속된 세상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구원의 아름다운 드라마에 감동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속화한 세상에서 신앙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초대되었다.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진리의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의 은사를 회복하는 일이다. 신앙 감각은 우리의 감각이 신앙으로 정화되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고 살 수 있게 하는 ‘카리스마(은사)’다. 신앙 감각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파견된 교회와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는 신앙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교회의 감각을 가지고 기쁘게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교회 생활이 세상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신앙을 문화생활의 일부로 여긴다. 교회를 떠나 믿음이 성장할 수 없는데도 제도권 교회에 몸을 담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교회 없이 자신만의 신앙에 안주하는 이가 많아졌다. 교회에 봉사하면 사업과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성직자와 수도자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믿음 전체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소비와 향락의 문화가 판을 치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느님께서 밥 먹여주시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믿음에 모든 것을 거는 극단적 선택도 생긴다.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종교에 몰두하거나, 자기 주변을 돌보지 않으면서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미사 시간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강론 시간에는 주보를 펴거나 묵주 기도를 하며, 신자들과 친교를 맺기가 싫어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제보다 먼저 퇴장하고, 행여 구역과 반모임에 나오라는 말을 들으면 손사래를 친다. 그야말로 ‘선택적 신앙’, ‘카페테리아 신앙’이 대세가 된 모양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느라 신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과 교회에 투신하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교회 생활은 엄연히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세상은 죄와 악이 판치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육肉을 취하고 사람이 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죽음으로 세상을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바꿔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또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드러내는 표징과 도구가 바로 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의 표징과 흔적을 찾으며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이 되게 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내 신앙이 성장하는 자리이고, 세상 사람들이 모인 하느님 백성의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초월적 갈망’이 시작되는 곳이다. 죄와 속됨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고 하셨던 창조의 아름다움을 다시 만나기 위하여 우리의 비뚤어진 감각을 새롭게 정화해야 하는 자리이다.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는 적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걱정보다 먼저 성호경을 긋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 잠들 때 감사 기도를 바치고, 공공장소에서 부끄러움 없이 식사 전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하며,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것(1테살 5,16-18 참조). 의무가 아닌 은총의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며, 성체 앞에서 자기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 주일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한 것뿐 아니라 하느님을 멀리한 모든 삶의 모순과 사랑하지 않은 죄를 고백할 줄 알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일. 성직자과 수도자의 인간적 결함을 신앙의 눈으로 덮어 주고 기도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일 등.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의 감각을 가지고 기쁘게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은 세상 밖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맹신과 다르다. 가톨릭 신앙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3,16) 하신 하느님의 보편된 사랑에 뿌리를 둔다. 이 보편성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이야말로 우리가 지내는 ‘신앙의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한해를, 불신과 미움의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적 감각을 하느님께 향하는 삶이 되도록 이끈다.

 

* 송용민 신부는 인천교구 소속으로 1997년에 사제품을 받고 2003년에 독일 본(Bonn) 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삼산동 성당 주임신부이자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이해를 찾는 신앙》을 썼고, 다음 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송용민 사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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