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사형 그 불편한 진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889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사형 그 불편한 진실


2011년 9월 8일, 우리나라에서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5,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1997년 12월 30일에 23명의 사형 집행이 있은 뒤로 참으로 다행스럽게 더 이상의 사형 집행은 없었다. 물론 사형 집행이 중단된 지 10년이 되었던 지난 2007년에는 국제 앰네스티로부터 우리나라도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라는 선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에는 엄연히 법정 최고형으로서 ‘사형’이라는 조항이 있고 현재도 60여 명의 사형수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가 사형 제도를 없애는 시점에서 아직까지도 사형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형 제도 폐지에 대한 논란

특히 지난 9월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된 사형 집행 중단 5,000일 행사에 주한 EU 대사가 직접 축사를 해주는 등 20여 개국이 넘는 각국 대사관에서 축하사절단이 참석했음에도 정작 국회를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은 사형 폐지법안을 발의한 박선영 위원과 김부겸 위원, 법사위원장인 우윤근 의원을 비롯한 4-5명만이 참석하였고, 그나마 몇몇은 그저 얼굴 인사만 하고 떠나버리는 슬픈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찬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요즘같이 흉악하고 인륜을 저버리는 범죄들이 생겨날수록 사람들은 저런 사람들까지 살려두어야 하느냐고 한다. 심지어 우리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범죄자들을 사형시키면 우리 사회에 흉악한 범죄들이 줄어들까?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가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나라보다 흉악범죄가 적을까? 어느 통계를 보아도 사형을 집행하면 흉악범죄가 줄어들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범죄자의 죽음으로 사회가 안정되거나 평화로워질 수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사회에서 제거될 수 있다는 생명 경시 풍조나 경제 효율 가치로 인간을 판단하는 더 큰 비인륜적 메시지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생명이기에 귀하거나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그렇다고 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들이나 노숙자들, 행려자들처럼 사회의 약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돌보아야 할 것인가? 교회가 가르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인간은 ‘그 자체, 생명 그 자체’이기에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우리가 수고하거나 땀 흘려서 얻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 6,39). 이 말씀에서 어느 누가 제외될 수 있단 말인가!


또 한 가지 불편한 진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 범죄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만일 내 부모나 형제자매들이 살해를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논리를 내세우면 어떤 사람도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가족을 잃고 슬픔과 아픔에 빠져있는 피해자 가족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범인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범죄 피해자 가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보복과 복수일까? 사형 집행으로 범인이 죽는다면 그 가족들이 이제는 편안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지난 9월 ‘사형 집행 중단 5,000일 행사’에 미국에서 아주 특별한 손님들이 오셨다. 그분들은 바로 MVFHR(Murder Victims’ Family for Human Rights)라는 ‘인권을 위한 살해 피해자 가족 협회’ 회원들이었다. 주로 범죄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이 중심이 된 시민단체이다.

이 단체가 하는 가장 큰 활동이 바로 ‘사형폐지 운동’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더 이상 사형 집행으로 또 다른 희생이나 죽임으로 아파하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의 이름으로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마치 모든 피해자 가족들이 사형을 원한다는 식으로 사형을 정당화하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모든 피해자 가족들이 이러지는 못한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와 원망의 마음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가족들도 있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그 아픔이 어찌 분노와 원망과 슬픔의 범벅이 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범죄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대신해 주는 보복이나 복수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당한 그 슬픔과 아픔을 함께해 주고 보살펴주는 것이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그렇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픔에 울고 있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아픔을 함께 울어주는 것이 아닐까?

바로 우리가, 이 사회가, 국가가 그들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겠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며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눈물을 거두어주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사형수를 죽인다고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형은 또 다시 가족을 잃게 되는 사형수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만들어낼 뿐이다. 슬픔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또 다른 슬픔이 더해지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온 손님들이 우리나라에 알려주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의 이름으로 그들을 죽이지 말라”

우리 교정사목에서도 아직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3년여 동안 살해 피해자 가족 모임인 ‘해밀(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우리말)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바로 피해자 가족을 위한 보살핌과 사목적 배려가 함께 이루어질 때 참다운 사형폐지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바로 그것이 모두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올바른 복음정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생활을 나누고,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해밀 가족들은 말한다. 가족을 잃고서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여기에서 받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외친다. 더 이상 또 다른 죽음을 만들지 말라고. 차라리 죽이지 말고 살려서 오래오래 반성하고 뉘우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해밀 가족들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며 어루만져주고 싶을 뿐이다. 구치소에서 만나는 신자 사형수들에게도 ‘뉘우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돌처럼 굳어져버린 마음을 만져주고 세상 어느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던 그들의 손을 잡아줄 뿐이다. 그렇게 함께 울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이 마음속에 겪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거두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살아남아 있는 모든 이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 시점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외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이름으로 그들을 죽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은 너무 손쉽게 피해자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독이 되는지, 그들을 또 다른 상처와 아픔으로 몰아가게 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피해자 가족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주 진지하게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형제도! 교회는 국가법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으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억울한 사형수가 되시어 인간의 삶을 마감하셨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외치셨다(루카 23,34 참조). 그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사랑의 절정이고 요약이며 마침이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기에 죽이고 살리는 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몫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느님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몫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인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였기에 그 사람도 죽여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더더욱 안 된다. 예수님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새로운 생명인 부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신앙인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다.

세상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그 모습을 보시니 그렇게 좋으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냥 좋으신 것도 아니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사형수들의 마음 안에,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깊게 깃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비천한 인간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생명 또한 귀하게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김성은 베드로(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


1,01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