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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교회의 대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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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9 ㅣ No.800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교회의 대안은?

 

 

여전히 세상은 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물론 사람들은 삶에서 도덕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하고, 문화적 풍요와 다양성을 노래하기도 하고, 삶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기도 한다. 삶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경제가 우리 삶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결정적 선택을 할 때 대부분 사람들이 경제적 논리를 따라가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목격한다.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증가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경제 중심주의가 우리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는 성경의 가르침을 선포하면서도 실제 현실에서 교회의 일을 할 때 돈의 논리, 경제의 논리를 따라가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발견한다. 신자 수 증가를 목표로 하는 교세 확장을 위한 행위들 안에서 자본주의의 성장주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신앙적 가치의 소중함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본주의 현실에서 복음적 선포를 이루어가려면 자본주의 방식을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다.”며 적당히 타협하려하는 교회의 모습을 여전히 본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종교화와 종교의 자본주의화가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의 대안적 노력들

 

교회는 이 경제 중심주의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자본주의 물질문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이 자본주의 경제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일종의 대안 경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경제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교회의 대안적 노력은 크게 보아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첫째, 교회 교도권은 경제 중심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으며, 일종의 경제 윤리적 선언들을 통해 포괄적 의미의 대안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윤리와 정의의 관점에서 경제 중심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비판해 왔다. 더 나아가 현 교황은 공동선과 연대의식과 무상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경제적 민주화와 경제의 문명화를 주장한다.

 

둘째, 신학자들은 현행 경제체제의 반신앙적 논리를 공박하며 신학적 경제라는 일종의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왔다.

 

셋째, 개별 교회 공동체들은 실천적 장에서 작은 대안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별 교회들은 도시본당과 농촌본당의 도농직거래를 통해 작게나마 자본주의 논리를 뛰어넘어 상생의 논리를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산 위의 마을’이라는 생활 공동체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대안 공동체 운동을 통해 경제 중심주의 삶과 자본주의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개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학적 경제(theological economy)?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사상(신학) 안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논리가 숨어있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한다. 신학자 믹스(Douglas Meeks)는 ‘경제(economy)’라는 말은 원래 하느님의 ‘경륜(Oikonomia)’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뿌리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며 “경제학자로서 하느님(God as Economist)”이라는 은유를 통해 경제문제는 곧 신앙의 문제임을 주장한다. 믹스는 경제문제가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되는 것은 하느님과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천명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경제는 선물과 증여에 기초를 둔 성체성사적 실천을 경제행위의 핵심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신학자 밀방크(John Milbank)는 그리스도교적 삶에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만큼이나 위협적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을 우상시하고 삶의 영역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자본주의 삶의 방식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이단임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인 교환의 과정은 선물(gift)의 논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contract)의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경제를 제시하고자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단절된 그리스도교적 사회주의 전통을 복구해야 한다고 밀방크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톨릭 사회교리는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치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현실사회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밀방크는 교회가 하느님의 경제(divine economy - 선물과 증여를 통한 교환의 경제)를 실현하는 공적 장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론이 뛰어난 그리스도교 사회 이론이라고 선언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 전통 안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 경제 형태를 찾으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신학자 롱(Stephen Long)은 자본주의의 중심 생산방식인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방식에 대응하는, 일종의 대안 경제의 한 방식으로 중세의 길드적 생산방식에 기초를 둔 탈중심적 생산제도를 제시하기도 하고, 중세 교회의 고리대금업 금지 전통을 살려, 이윤 추구가 핵심인 자본주의제 생활양식에 대한 하나의 대안의 근거로 삼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카바나(William Cavanugh)는 본당과 본당이 미시 경제적 차원에서 일종의 성체성사적 경제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자유 시장(free market)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이탈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오직 교회만이 창조질서에 기초를 둔 대안 경제를 실천할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여, 대안 경제의 실천에서 개별교회의 역할을 매우 강조한다.

 

물론 대안 경제를 향한 신학자들의 이러한 신학적 상상력이 얼마나 실천적 힘을 지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인간학적 대응 또는 영성적 대응

 

현행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교회의 비판과 대안적 노력들은 단순히 유물론적 관점에서 또 다른 하나의 경제체제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하나의 대안 경제체제를 설정하는 것은 어쩌면 교회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언제나 물질적 차원과 표피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경제문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문제의 그 밑바닥에는 인간학적 문제가 깔려 있다(“진리 안의 사랑”, 75항). 그리고 교회의 인간학적 이해 안에는 언제나 물질적 차원과 영적인 차원 모두가 포함된다(“진리 안의 사랑”, 76항). 따라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항상 인간학적이며 영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 중심주의가 확산된 것은 경제 제도 자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삶에서 “윤리적이고 종교적 차원을 무시함으로써 사회 - 문화 체제가 약화”(“간추린 사회 교리”, 375항)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 중심주의를 극복하려면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교회는 끊임없이 지적한다. 곧, 교회는 우리 삶의 사회문화적 차원을 강화함으로써 경제 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우회적인 길,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의 길을 택한다. 왜냐하면 경제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경제적 차원에서만 대응하는 것은 결국 경제 환원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의 식민화와 자발적 예속을 넘어서는 길은?

 

사실 경제 중심주의가 확대되면 될수록 삶의 다른 모든 영역들마저도 경제적 논리에 지배받게 된다. 우리의 삶이 돈이나 시장권력에 종속되는 일종의 삶의 식민화가 진행된다. 생활세계 안에서 사회적 가치, 문화적 가치, 신앙적 가치 등은 소홀히 취급되고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모든 것이 재단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하버마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행위의 기반이 윤리가 아닌 경제적 타당성과 외형적 적법성에만 기초하게 된다.

 

이러한 삶의 식민화 과정 안에는 인간의 자발적 예속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윤리적 가치나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경쟁에서 실패를 초래한다고 믿으며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경제적 논리에 자발적으로(?) 예속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베르나르 마리스가 지적하듯이, “우리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영원히 자신의 돌을 굴릴 운명에 처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믿는 척하면서 (기업을 위하여, 생산을 위하여…) 자신을 욕되게 하고 예속하는 행위를 날마다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삶의 식민화 과정을 극복하고 자발적 예속이라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은 있는 것일까?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모든 차원이 제 나름의 무게와 자리를 고유하게 차지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모방적 경쟁을 의례화하고 제도화하는 이 경제적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교회는 어떤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시대의 신학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경제 중심주의를 넘어서게 할 수 있는 신앙적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 시대의 교회와 신학은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결집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가? 이 시대의 교회와 신학이 신앙인들이 대안적 사유방식과 대안적 행동방식을 택할 수 있도록 유인하고 있는가?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 스스로가 깨어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는가?

 

“우리 모두는  /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먹는다네”라는 박노해의 시(“자기 삶의 연구자”) 구절처럼 우리가 깨어있는 신앙인(의식인)으로 사는 것만이 경제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인가? 결국 우리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교회이기 때문에?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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