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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5: 윤을수 신부 (하) 인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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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2-21 ㅣ No.501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5) 윤을수 신부(하 · 1907-1971)


인보(隣保)의 삶

 

 

윤을수 신부가 1953년 골룸바 어린이집 학생들과 미군부대 성당을 방문, 위문 공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윤을수 신부는 뉴욕 문화원 교수로 있으면서 이승만 박사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건너간 터였기에 윤 신부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 박사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이는 이 박사가 귀국해서 직접 한 증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여기 있는 윤을수 신부와 메리놀 전교회 안 신부도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분들입니다…."(「경향잡지」 1948년 8월호 '독립 축원 미사성제'에서)

 

 

대신학교 성신대학장으로

 

윤 신부는 해방 후 3년 가까이 더 미국에 머물다 1948년 2월 귀국했으며, 곧바로 대신학교인 성신대학장에 임명됐다. 한국의 첫 박사 사제에게 걸맞은 소임이었다. 이와 함께 교황청 직속 전교회의 한국 책임도 맡았다.

 

한복을 입고 있던 신학생들에게 양복을 입게 하는 개혁 조치를 취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윤 신부는 2년 만인 1949년 12월 성신대학장을 사임한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사제학자로서 후학 양성의 고목이 돼 주기를 기대하던 교회 지도부에는 뜻밖이었지만 윤 신부에게는 이미 그런 징후가 보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윤 신부는 때때로 변두리 빈민촌을 돌아다니다 밤늦게 돌아와 성체조배를 하곤 했는데 왜 그렇게 방황하며 다니느냐는 후배 신부의 물음에 "주님만이 내 마음을 아신다"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 신부는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인간은 물질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을 살게 돼 있으며 두 가지 욕구가 모두 충족돼야 한다. 목적을 생각하면 교육이 물질적 재산보다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물질적 자원은 목숨을 지탱시켜 주고 정신을 성장시키는 밑바탕이기에 좀 더 시급히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현실을 개선하는 것은 '더 시급히 필요한' 일임을 윤 신부는 빈민촌을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전쟁, 그리고 구호 활동

 

성신대학장에서 물러난 윤 신부는 교구장 비서 겸 경향신문 고문으로 임명됐다. 불어와 영어, 독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한 윤 신부는 그해 5월 교황청을 방문하는 노기남 주교를 수행했다. 노 주교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파리에 있을 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국길에 올랐다.

 

9ㆍ28 수복과 함께 서울에 들어온 윤 신부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고자 인보회(한국 카리타스)를 설립하고 한국 지부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초 1ㆍ4 후퇴 때에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피난가지 못한 신자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51년 3월 미 제1군단 군종사제로 임명된 윤 신부는 사회사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골롬바사'라는 사회사업 단체를 세웠다. 이와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경기도 소사에 어린이집을 시작하면서 그해 여름 서울에서도 부암동 대원군 별장(석파정)을 빌려 골롬바 어린이집을 열었다. 1953년 3월에는 미군들이 운영하던 청평 고아원도 맡아 친애원이라고 이름지었다.

 

윤 신부는 이 아이들을 결코 '고아'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아원'이란 이름 대신 '어린이집' 또는 '친애원'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아이들에게도 "너희는 고아가 아니고 하느님의 자식이다. 어머니는 성모님, 아버지는 하느님으로 여기고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지 말라"고 격려했다고 전한다.

 

휴전 후 구호 및 복구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윤 신부는 미국 가톨릭 구제회 등을 통해 구호물자를 가져오는 한편, 가난한 이들의 자립에도 힘을 쏟았다. 평택 아산 지방에 개척 사업을 시도했으며, 청평본당 주임 시절(1954~1960)에는 대성리와 입석리 등 본당 관할 한강 유역에 대한 개간사업을 벌여 옥수수와 땅콩 등을 재배했다.

 

사회사업 분야의 책임있는 관계자로서 윤 신부는 국제 대회에 참가해 외국의 사회 복지 및 개발 사업 현장을 둘러보고 진전된 사회사업을 펼치고자 했다. 사회 사업은 먹고 남은 것을 주는 자선사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고 자활할 수 있는 사업이 돼야 한다는 것이 윤 신부 생각이었다.

 

1958년 6월 인보성체수도회 첫 착복식에서 윤을수 신부.(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수도회 창설 기틀 마련

 

윤 신부는 이를 위해 1956년 11월 경기도 소사에 한국 최초 사회사업전문학교인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한다. 2년제 과정으로 사회사업 전문 인력 양성 기관이었지만 또한 윤 신부가 고아들을 위한 어린이집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뜻을 두어왔던 수녀회 설립을 가시화하는 포석이기도 했다. 입학 자격이 고등학교 졸업 또는 동등한 자격 이상 17~25살 미혼 여성으로 교구장이나 수도원장 추천을 받아야 했고, 입학하면 수도생활에 버금하는 합숙 생활을 했다. 실제로 인보성체수도회는 구산후생학교 설립일인 1956년 11월 19일을 수도회 설립일로 지내고 있다.

 

윤 신부는 이듬해 초 학생들 가운데 수도생활에 뜻 있는 이들을 모아 수도반을 만들었고, 1958년 6월에는 서울교구 소속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인보성체수도회는 2년 후인 1960년 10월 1일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58년 나환우촌인 안양 라자로마을 원장이 공석이 되자 윤 신부가 3대 원장으로 추대됐다. 윤 신부는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원생 여러분은 인보회 식구다. 인보라는 말은 가까운 이웃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고 헐벗고 굶주리는 고아, 병자를 돌봐주는 것이 인보회 정신이다. 인간은 식자ㆍ무식자ㆍ부자ㆍ 빈자, 건강한 자, 병든 자, 모두가 하느님 앞에는 평등하다…."

 

윤 신부는 외국 원조를 받아 나환우들이 불편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원을 새로 지은 것은 물론 나환우 자녀들을 위한 시설과 나환우 자립 마을 등을 세워 취임식 때 밝힌 그대로 나환우들이 인격적 존엄함을 지니고 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윤 신부는 5ㆍ16 후 군사정권이 라자로마을 나환우들을 모두 소록도로 이송하려 했을 때 직접 군사정권 내각 수반을 찾아가 "한 사람도 소록도로 보낼 수 없다"고 적극적으로 맞서기도 했다.

 

윤을수 신부가 1958년 6월 17일 구산후생학교 졸업식을 주례하고 있다. 졸업생들은 사회사업가로서의 사명을 서약하고 촛불을 봉헌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윤 신부의 활동은 계속됐다. 수녀회를 미국에 진출시켜 첫 분원을 열었으며, 부산교구에서 맡고 있던 충무(현재 통영)시 충렬여자중학교와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도 인수받아 수녀들이 운영토록 했다. 또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인보기술학교를 열어 중학교 과정과 취업 기술도 함께 가르쳤다. 또 1962년에는 덕산에 있는 고아원(덕산 신생원)을 인수, 수녀들을 파견했다. 윤 신부는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5년 윤 신부는 이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사회사업으로 인한 부채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이 세운 수도회와도 결별한 윤 신부는 청평 대성리에서 잠시 지내다가 1966년 이탈리아를 거쳐 196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에서 지냈다.

 

윤 신부는 1971년 2월 귀국해 폐부종 등으로 투병하다가 그해 5월 9일 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 자신의 이름 을수(乙洙)를 풀어서 '새(乙)가 물가(水)에 감돈다'는 뜻으로 호를 새감이라고 지은 윤 신부는 그토록 안기고 싶어하던 참 행복의 근원인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긴 것이다.

 

윤 신부 장례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윤 신부 묘비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대로 이런 글이 새겨졌다.

 

"어머님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에 전해주!"

 

[평화신문, 2010년 1월 31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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