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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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1015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덕원 수도원 소속
1914년 3월 31일 경기 파주 갈곡리에서 출생
세례명 : 아우구스티노
첫서원 : 1939년 4월 10일
사제서품 : 1942년 5월 1일
소임 : 덕원 본당 보좌, 수련장 보좌, 덕원 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


김치호 베네딕도(金致鎬, 1914~1950) 신부는 1914년 3월 31일 서울 대목구 내에서 유명한 교우촌 갈곡리 공소(현 경기도 파주시 법원면 갈곡리)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6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서울 백동 수도원에 제화공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한 후 진로를 바꾸었다. 평소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그는 1927년 12월 1일부터 덕원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 사제성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비과를 마친 후 1929년부터 중등과정을 이수하였고, 1936년 말에는 철학과정을 시작하여 1938년 봄에 마쳤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던 그는 1938년 4월 9일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법정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착복식에서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는 그에게 수도회의 창립자인 베네딕도 성인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정해주면서, “이 젊은 수련자가 성 베네딕도회가 동양에서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성직지망 수련자가 입회한 일은 성 베네딕도회가 조선에 진출한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와 같이 철학과를 마친 연길 대목구 소속 신학생 두 명도 연길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했다. 덕원 신학교 교지인 신우지에 실린 그의 수도원 입회 소감을 살펴보면, 무르익은 신앙과 그간 신학교에서 쌓은 학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정서도 풍부하여 소감문에 다음과 같은 짧은 시를 남겼다.

예수여 당신은 왜 이다지도 나를 사랑하십니까?
오! 나의 태양이신 예수여!
나는 해바라기 꽃이 되오리다.
다볼산으로 가시려니까?
골고타로 가시려니까?
나는 해바라기 꽃이 되오리다.
오직 내게 네 빛을 쏟으소서.

1939년 부활 대축일 다음날 4월 10일, 그는 첫서원을 발하고 바로 신학과에 들어갔다. 1942년 5월 1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덕원 수도원이 배출한 첫 한국인 성직수사로 기록되었다. 1942년 6월부터 그는 덕원 본당 보좌로 일하면서 청년사목을 담당했다. 강론을 매우 잘했으며 문장도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여러 가지 관악기와 현악기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또한 독일어 실력이 뛰어나서 선교지에 막 도착한 젊은 독일인 선교사들이 우리말 강론 준비를 하는 일을 도왔다. 1945년에는 덕원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폐병을 앓아 사목활동에 애로가 많았다.

1949년 5월 10일과 11일,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는 두 차례에 걸쳐 덕원 수도원을 수색했다. 일차 수색에서 수도원 장상들이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었다. 이차 수색에서는 나머지 독일인 선교사와 그를 비롯한 한국인 신부들이 같은 수순을 밟아 평양으로 압송되어 갔다. 수감생활은 폐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당시 평양 인민교화소에 그와 함께 수감되었던 경도범 엘리지오(Eligius Kohler, 景道範, 1899-1963) 신부의 증언은 열악했던 교화소 내부 사정을 알려준다.

“김 베네딕도 신부는 여러 명이 함께 수감된 습기 찬 좁은 감방(8평방미터 크기에 18명이 수감됨)에서 호흡이 곤란했고 밤중에 지독히 코를 골았다. 그러나 가련한 형제를 깨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전염 위험성이 있는 폐병을 앓고 있는 그를 격리된 공간으로 옮겨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950년 10월 5일, 연합군에 밀려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들에게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신우 제6호(덕원 신학교, 1938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1997년)

[분도, 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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