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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사회복지 활동에 관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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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07

사회복지 활동에 관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I. 들어가는 말

 

사회 복지 활동은 우선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이 활동은 사고나 질병, 자연 재해나 불의한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걸맞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이며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부여받은 합당한 삶에 대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여 물질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삶을 도와주는 활동이다. 

 

사회 복지 활동은 모든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직업, 위로, 병의 치료, 생활 운영 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식주와 위로를 제공하거나 직업교육을 시키거나 병을 치료해 주고 나아가서 매일의 생활 운영을 도와주는 활동들을 지칭한다고 본다. 이 활동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걸맞는 삶의 기회를 마련해 주며, 합당한 삶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 찾아주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법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 방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연관되며, 우리가 하나만을 선택하고 다른 것을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이들에게 진정으로 합당한 삶을 제공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둘 다 함께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방법은 사회 복지 활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든지 상관없이 당장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어서 혼자 살아갈 수도 없고, 도움을 제공할 친척이나 친지가 전혀 없어서 무의탁 상태에 놓인 사람을 돌보는 활동들이다. 이러한 활동은 그들에게 의식주나 위로, 질병의 치료 등을 마련해 주어 정당한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사회제도의 개혁이나 사회발전을 위한 활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회 복지 활동이 절실히 필요하고 훌륭한 것이라 해도 가난한 이들에게 충분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질병의 치료와 직업교육도 있어야 하겠지만, 장래에도 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덜 발생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는 사회제도의 개혁과 사회발전 전략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건은 사회 복지 활동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이들의 수를 줄여보려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 곤경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에 파묻히고 온 정신을 쓰는 사회 복지 활동을 강조하면서 사회 개혁이나 발전에 무관심한 것을 합당하지 못하고 문제성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동시에, 좋은 미래를 건설하고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만 몰두하여 당장 극심한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돕는 사회 복지 활동을 도외시하며 가난한 이들을 방치하는 것도 도저히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회 복지 활동과 아울러 사회 개혁 활동이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종합적 안목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II.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주된 내용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사회 복지 활동보다는 주로 사회 개혁이나 사회발전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가르침은 왜 사회 복지 활동을 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그 활동을 펼쳐 나갈 것인지를 논의하기보다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배치되는 기존 사회제도의 문제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떻게 사회를 개혁하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하여 주로 가르치고 있다. 

 

교회의 사회족 가르핌이 사회 개혁의 이유와 반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주된 까닭은 기존의 사회제도가 빈부의 극심한 격차를 산출하고 수많은 빈곤층의 생활을 참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근대 사회적 가르침의 효시라고 불리는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 회칙 「노동헌장」(Rerum Novarm. 1891)이 공산주의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며, 사유재산 제도를 강력하게 옹호하여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가의 여러 가지 역할과 노동 조합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물론 극심하게 가난했던 노동 계층의 생활개선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적 가르침이 주로 사회 개혁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 가르침의 주된 관심대상은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에 부합한 생활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그 목표인 것이다. 사회적 가르침의 이러한 내용과 방향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는 사회 복지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회칙「노동헌장」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나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보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근로자들 대부분이 부당하게도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들을 도와주는 적절한 해결 방안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모든 사람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점차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왔다. ……고리대금업은 여전히 성행하고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형태로 그러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다”(1항).

 

「노동헌장」에서 레오 13세 교황은 가난한 노동 대중의 극심한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의 시급함을 주장하면서도 몇 가지 제도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교회의 오래된 자선활동 즉 사회 복지 활동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장려했으며 매우 중요한 활동으로 강조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있어서 사회 개혁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사회 복지 활동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같은 회칙에서 레오 13세 교황은 사회 복지 활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훌륭하게 이 자선사업을 추진해 왔다. ……사도들은 매일의 자선행위를 부제들에게 맡겼는데 부제직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제정된 직분이었다. ……사실상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 모두의 공동 어머니로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웅적 자선행위를 독려하고 실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여러 수도 단체와 다른 자선 단체를 탄생시켰는데, 이 단체들은 도움과 위안을 받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비참한 처지를 그냥 방치하지 않았다”(21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사실 거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돕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사회 회칙에서 다루는 주제를 대개 14개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기본 원리, 사유 재산권, 가톨릭 사회교리와 마르크스주의, 세계 경제질서와 개발 원조, 경제질서의 기초,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 조합 등 7개의 주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7개 주제, 사회교리에 대한 교회의 책무, 교회와 국가, 언론과 여론, 사회 요소인 가정, 전쟁과 평화, 교회와 민주주의, 인권과 국가와 사회 등은 간접적으로만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연관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사회 복지 활동을 염두에 두면서 몇 가지 점만을 말해 볼까 한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인가? 사회 개혁과 사회 복지 활동이 어떻게 교회의 사명과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인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할까 한다. 

 

 

III. 교회의 사명과 목적

 

교회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성부의 나라를 향하여 여행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신자들의 단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성문화된 정관이 있든지 없든지 사람들의 모든 단체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탄생한다. 그렇다면 하는님 백성이라고 불리는 신자들의 단체인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인가? 앞의 정의에 나타나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충분한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문서 ‘교회헌장’에는 교회의 목적과 사명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일치를 위하여 선정하신 이 백성을 또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으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아 온 세상에 파견하셨다”(9항). 이 대목은 분명히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고 교회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의 도구가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그 설명이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헌장’에서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이 무엇인지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는 문헌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평신도교령’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설명하는 강연이나 글, 주교님들의 말씀을 들어볼 때에 ‘평신도교령’을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매우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예리하게 질문하는 마음이 없거나 혹은 ‘평신도교령’을 심도있게 연구한 이들이 드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신도교령’을 연구해야 ‘교회헌장’ 9항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교령’은 교회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고 부른다”(2항).

 

이 문헌은 교회가 창립된 목적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한다. 첫째 목적은 먼저 그리스도의 왕국, 교회를 전세계에 퍼뜨려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해서 그들이 구원받게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복음을 전하고 전교해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어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창립한 첫째 목적이다. 

 

둘째 목적은 전세계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발견되는 말마디만으로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의 의미는 같은 교령의 5항을 보면 좀더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교회를 전세계에 펴는 것”과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사도직’이란 말의 뜻이다. 사도직은 교회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신자들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활동이나 평신도의 활동이나 상관없이 그리고 개인적 활동이나 단체적 활동을 불문하고 교회 설립의 목적 달성을 위한 활동이면 모두 사도직이 된다. 

 

2항의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자면 교령의 5항을 연구해야 한다. 이 항목은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의 목적과 교회의 사명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 뿐아니라 현세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5항).

 

이 대목은 예수님의 구원활동의 목적과 교회의 사명이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창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의 둘째 목적에 대한 설명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교회헌장’의 9항은 그것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아”라고 표현했고, 평신도교령의 2항은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평신도교령의 5항은 둘째 목적을 “현세질서를 개선하는 것”과 “현세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삼는 것”과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현세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복음 정신에 위배되는 현세질서, 즉 사회제도와 관습은 모두 복음 정신에 부합되게 개혁되어야 하며 그 개혁 작업이 교회의 사명과 목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 극심한 빈부 격차를 초래하여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해치는 제도와 관습은 모두 복음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불의한 제도와 관습을 개혁하는 것은 교회가 의당히 그리고 필수적으로 수행할 과업이다. 

 

우리가 교회의 목적이 두 가지라는 점에 주목하여 교회의 신원에 대한 그릇된 오해에 떨어지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 교회 창립의 첫째 목적은 교회가 사회 개혁만을 추구하는 사회 개혁 운동 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첫째 목적 때문에 교회가 인간의 구원이나 내세의 행복을 도외시하는 사회운동 단체와 같아질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추구하고 그것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한편, 그 둘째 목적 때문에 교회는 현세질서의 불의함에 무관심하고 그것을 개혁하는 노력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면서 현세 문제에서 초연하게 인간의 구원과 내세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단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둘째 목적을 망각하고 깨닫지 못하여 불의한 현세질서를 묵인하였고 그것을 제거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을 교회의 과업과는 전연 무관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불의한 체제의 옹호자로 혹은 사회 개혁의 방해자로 비난받기도 했다. 

 

사회 개혁이 교회의 한 가지 중대한 사명이고 목적이라는 교회관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그 이전의 사회 회칙들, 예를 들면 레오 13세의「노동헌장」과 비오 11세의「사십주년」(1937)에서는 교황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깊은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교리를 제시하면서 교회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교황들의 회칙 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거나, 경제 문제가 도덕 문제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회칙을 발표하여 사회적 가르침을 준다는 말은 있어도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고 사회 개혁도 교회의 한 가지 목적이라는 신학적 논증이 없다. 따라서 공의회 문헌에 비하여 그 이전의 사회 회칙의 영향력이 적었다고 보인다. 

 

공의회 이후로 교회의 목적과 복음화에 대한 성찰이 계속되어서 교회의 목적이 복음화라는 것뿐 아니라 복음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좀더 명확하고 폭넓은 규명이 발전했다. 복음화에 대한 깊은 이해는 또한 교회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백히 하는 데 공헌하였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은 제2차 세계주교대의원회(Synod)가 발표한 문서인 ‘세계 정의’(1971)의 서론의 한 구절이다. “따라서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개혁활동에의 참여는 복음선포(복음화)의 본질적 구성 요소임이 명백하다. 즉 인류를 구원하고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의 일부인 것이다.” 정의를 위한 개혁활동이 복음화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개혁활동없는 복음화는 진정한 복음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교회사명의 전체는 아니고 단지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과 복음화에 연관되어 자주 거론되는 또 다른 문건은 교황 바오로 6세의「현대의 복음선교」(1975) 19항이다. 이것은 복음화 개념에 대한 과거의 오해를 고쳐줄 목적으로 복음화의 뜻을 매우 친절하고 상세하게 정의해 준다. “교회로서 복음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욱 넓은 지역에서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다.”

 

과거에는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가르쳐서 입교시키는 것이 복음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다른 사상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를 가르치고 그들이 신자가 된다면 그들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 그리고 생활양식이 바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의 사상과 생활양식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것들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적 노력 즉 사상과 생활양식의 개혁활동도 복음화의 일부로 보는경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상의 두 문서는 복음화의 의미를 보다 충분하게 그리고 보다 넓게 규정해 주었고 복음화에는 반드시 정의를 위한 개혁활동이 포함된다는 중요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IV. 가난한 이들에 관한 우선적 선택

 

공의회와 그 이후로 교회의 사명과 목적 그리고 복음화의 의미에 관한 성찰이 발전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안에는 “가난한 이들에 관한 우선적 선택”이란 개념이 등장하여 상당한 관심을 야기했으나 그 의미가 그렇게 선명한 것은 아니다. 

 

도날 도어 신부는 교황들의 사회 회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책 제목을「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그의 책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확실하게 알게 된다. 서양에서만 아니라 제3세계에서도 이 개념은 혼란과 위협을 자아냈다고 그는 전한다. 

 

도어에 의하면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이란 일반 민중에 대한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지배를 지속시키고 조장하는 계급사회에서 불의한 질서와 구조적 불의에 대한 거부적 반응이다. 그가 어떤 사회를 불의한 계급사회 혹은 불의한 질서로 보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중남미 사회만이 불의한 계급사회인지 혹은 빈부 격차가 덜 심한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들도 모두 불의한 계급사회라고 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도어의 견해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리 빈부 격차가 적어도 모두 불의한 계급사회이고 사회주의 사회만이 정의로운 사회로 보는 것 같다. 문제있는 견해이다. 

 

‘우선적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도어 신부에 의하면 ‘선택’의 행위를 해야 하는 사람은 부유층이나 가난한 계층이 아니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다.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불의한 제도와 기관에 종사하면서 그것을 운용하고 따라서 구조적 불의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간 계층의 개인들이나 공동체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교구, 본당 혹은 신자 단체들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는 것인가? 도어에 의하면 그 선택은 지배층의 이권에 봉사하기를 포기하고 피지배층과 유대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혜택을 적게 누리는 가난한 이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기구와 기관에서 일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생활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의 삶, 슬픔, 기쁨, 희망과 공포를 함께 나누면서 그들과 유대를 맺는 것이 그러한 선택이다. 이러한 생활없이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체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들의 무력감과 종속감을 증가시킬 뿐이다. 

 

이런 것이 대충 도어 신부가 말하는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의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에 비추어 볼 때에 도어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효시인 레오 13세의 회칙「노동헌장」은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노동헌장」이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가나한 노동 계급의 편에 서게 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 가르침은 그러한 선택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동헌장」은 경제적 힘을 가진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위에서부터’의 변화를 촉구하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칙은 노동자들이 기업인의 재산을 손상하는 것을 금하고, 파업의 정당성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칙은 노동자들이 공공질서를 깨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어 신부는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1961)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에 보다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요한 23세 교황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사회주의 정당의 정책과 유사한 제도를 지지하고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교황은 복지 국가와 그 제도를 지지함으로써 온건한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가톨릭교회에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노동자들이 회사 자산과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국가의 다양한 수준의 결정 과정에서 발언권을 가지기를 원했다. 교황은 국가가 대기업을 엄격하게 통제하기를 원했으며 현대 상황의 요구에 따라 재산의 국유화 확대를 찬성했다. 교황은 또한 국가가 세금과 조세 제도, 금융, 사회 보험, 가격 보호, 가공 산업의 육성, 농업 설비의 개선 등을 통해서 농민을 보호하기를 원했다. 교황이 국가의 더 많은 간섭을 지지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이권을 촉진하려고 했다는 의미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에 보다 접근했다는 것이다. 

 

도어에 의하면 요한 23세의 이러한 가르침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새로운 방향을 가져왔고, 이후로 사회적 가르침이 ‘우익’보다는 ‘좌익’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현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과도한 복지 국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노동헌장」반포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칙「백주년」(1991)에서 소위 ‘원조 국가’를 비판한다. 회칙에서 원조 국가는 과도한 복지 국가를 의미한다. 교황은 원조 국가는 국가 기능을 잘못 이해한 데서 발생하고 보조성의 원리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출현했다고 비판한다. 교황은 원조 국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인간들의 능력을 감소시키며 거대한 공공 기구를 만들어 대단히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원조 국가의 거대한 관료적 기구는 시민들에게 줄 서비스에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들을 더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인데 원조 국가는 그것을 방해한다. 인간의 어떤 요구는 물질로만 충족될 수 없는 것인데 원조 국가는 그 점을 무시한다는 것이다(48항).

 

 

V. 자선활동과 복지활동  

 

이렇게 고찰하면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아무래도 복지활동보다는 사회제도의 개혁활동의 일종이라고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주로 개혁활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자선활동과 복지활동에 대하여는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개혁활동과 복지활동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비등하게 중요한 것이며 서로 배타적이기보다는 상호 보충적이기 때문이다. 

 

사회 회칙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을 통틀어 볼 때에 자선활동과 복지활동 등에 대하여 조금 길게 언급하는 문헌은 레오 13세 교황의「노동헌장」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평신도교령’이라고 생각한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노동헌장」은 21항에서 교회가 노동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외에 수많은 단체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어왔다고 말한다. 교회의 반대자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찬양했다. 사도시대의 부제직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제정되었고 사도 바오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희사금을 모금했다. 그후에 교회는 수많은 수도회와 자선 단체를 탄생시켜 온갖 종류의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와주었다. 어떤 비판자들은 이 자선활동이 법률적 성격의 원조사업으로 대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지만 자선활동은 교회의 도덕적 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평신도교령’은 7항에서 교회의 두 번째 목적인 현세질서의 그리스도교화 즉 사회의 복음화를 다소 길게 논의한 다음, 8항에서 전통적인 자선사업을 이야기하고 아울러 외국 원조도 거론한다. 

 

자선사업은 본질적으로 생생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활동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 사랑의 표지로 식별되며 다른 사람들의 자선사업을 기뻐하는 동시에 자선사업은 교회의 의무요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고 주장한다. 

 

율법에서도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이 작은 형제들 중의 한 사람에게 베풀 때마다 곧 내게 베푼 것이니라.”(마태 25.40) 하시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요한 13.35) 하시었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의약, 직업, 교육 등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빼앗긴 사람들, 가난과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들, 추방당하고 옥고를 겪는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교회의 사랑은 그들을 찾아내어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적절하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을 마다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 이 글은 1996년 6월 27일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위원회 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임. 

 

[사목, 1996년 10월호, 오경환(인천교구 총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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