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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3: 윤의병 신부 (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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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3) 윤의병 신부(상 · 1889-1950, 납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은화」의 저자 윤의병(바오로) 신부는 1989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골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윤자호(바오로)의 5대손 윤상우의 5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큰아버지가 사는 진천군 백곡면 용진골로 이사한 의병은 큰아버지 윤상운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리고 14살 때인 1903년 용산신학교(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윤 신부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이 밖에는 알려진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하지만 순교자 가문으로 후손들이 박해를 피해 흩어져 산 것을 감안한다면 구교우 집안이 그랬듯이 의병도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신학교에까지 입학하게 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윤 신부는 31살 때인 1920년 9월 18일 최종철(마르코)ㆍ김유룡(필립보)ㆍ신성우(마르코)ㆍ신인식(바오로) 부제와 함께 종현(명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윤 신부의 첫 임지는 장호원(현 감곡)본당 보좌였다. 그러나 장호원본당은 관할 구역 가운데 하나인 고마리 공소가 성당을 지으려고 하고 있어서 윤 신부는 바로 고마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고마리는 괴산군 전역과 보은 진천 청주 일대를 관할하게 됐다.
고마리에 부임한 윤 신부는 즉시 성당 건립에 착후,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그러나 '높은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고마리는 깊은 산촌인데다 신자들은 착하고 열심했지만 대부분 옹기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어 이동이 잦았을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 신부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겨 1923년 숭애의숙이라는 강습소를 열었다. 아이들이 늘고 규모가 커지면서 1925년에는 12칸짜리 교사를 지었다. 또 1927년에는 수녀원을 겸한 집을 새로 짓고 이듬해에는 서울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을 초청했다. 수녀 2명이 내려와 6~12살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일본말, 산수,노래, 교리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윤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미 신학교 때부터 위궤양을 앓아 입원 생활을 하기도 한 윤 신부는 고마리본당에서도 종종 아팠던 것 같다. 교통편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20곳이 넘는 공소를 돌아다니다 보니 제때에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위궤양은 점점 더 심해졌을 것이다. 탈진 상태에서 주일미사 강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1931년 부활절 직후에는 서울에 올라갔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뮈텔 주교가 수녀들과 함께 윤 신부의 회복을 위해 9일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돼 윤 신부는 휴식 후 괴산으로 돌아왔지만 거듭되는 과로 때문이었는지 그는 이번에는 폐렴을 앓게 된다.
결국 윤 신부는 1932년 9월 첫임지인 고마리를 뒤로 한 채 요양을 겸해 행주본당(현 의정부교구 행주본당)으로 전임됐다.
한편 고마리본당은 후임 정원진 신부가 1936년 본당 소재지를 증평으로 옮기면서 공소로 격하됐다. 그러나 윤 신부를 기억하던 신자들은 고마리본당 설정 60주년이 되던 1980년 윤 신부를 기리는 공적비를 옛 성당터에 세워 윤 신부의 업적을 이렇게 기렸다.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시어 사제관도 없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러다 신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이 지방을 잘 파악하시어 숭애의숙 사립학교를 건립하시어 이 지방 사람들은 물론 타 지방에까지 배움의 길을 터놓으셨으며, 지방 발전은 물론 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남기셨다. 이리하여 남녀 문맹자가 없는 마을 하면 이곳이라는 말까지 말까지 듣게 되었다. 윤 신부님께서는 수백 리를 고행으로 판공을 다니셨으며 이 밖에도 신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평화신문, 2009년 12월 20일, 이창훈 기자] 0 57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