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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 룸메이트로 만난 세 학생, 예수회 역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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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30 ㅣ No.1153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 룸메이트로 만난 세 학생, 예수회 역사가 되다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Gassu y Javier, 1506~1552)는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지금의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수도 팜플로나(Pamplona)에서 동쪽으로 52㎞ 떨어진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때 이 성은 이미 지어진 지 600년이나 됐다. ‘하비에르’는 우리말로 ‘새집’이란 뜻이다. 

 

그의 아버지 후안 데 하수(Juan de Jaso)는 당시 나바라 왕 장 달브레(Jean d’Albret)의 재무장관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데 아즈필쿠에타(Maria de Azpilcueta)는 나바라 귀족 가문의 유일한 유산 상속녀이자 하비에르성의 소유자였다. 하비에르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60세가 넘었다. 

 

나바라 왕국은 유럽 대륙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프랑스와 카스티야 연합왕국 사이에 있었다. 두 나라는 서로 나바라 왕국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비에르가 여섯 살 되던 1512년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가 나바라를 침공해 강제 병합시켰다. 이후 나바라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은 18년이나 지속되며 피를 뿌렸다. 

 

하비에르는 전쟁 속에서 자랐다. 하비에르가 아홉 살이던 1515년 10월 16일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가문은 몰락했다. 그 해 하비에르는 미구엘(Miguel) 신부에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몇 달 후 1516년 6월 23일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죽었다. 

 

에스파냐 초대 국왕 카를로스 1세(Carlos I)는 열여섯 살로 어렸다. 나바라는 독립을 시도했다. 나바라 왕은 프랑스 군대와 함께 나바라 왕국의 탈환을 위해 돌아왔다. 나바라 사람들도 독립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하비에르의 두 형 미구엘과 후안, 사촌들도 이 독립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지고 나바라는 에스파냐의 손에 들어갔다. 

 

독립 전투에 하비에르 가문이 가담한 사실이 에스파냐에 알려지자 에스파냐 어린 왕의 섭정이며 나바라 지역 총독이었던 시스네로스(Cisneros) 추기경은 하비에르 가문 소유의 토지를 빼앗고 하비에르성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새집’의 외벽, 성문, 두 탑이 무너져내렸다. 성채는 절반쯤 무너졌다. 하비에르의 두 형과 사촌들은 성을 떠나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1521년 5월 프랑스 군대가 다시 나바라로 들어왔을 때 하비에르는 열다섯 살이었다. 나바라 사람들은 다시 독립을 희망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이 초반에 승세를 보이며 팜플로나에 진격했다. 1521년 5월 20일 나바라 독립 무장군은 새로 쌓은 팜플로나의 성채에 대포를 퍼부었다. 그 성채에서 에스파냐군을 지휘하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포환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전투에서 패했다. 이니고는 서른 살이었다. 하비에르 가문과 이니고는 팜플로나 전투에서 적으로 만났다. 

 

독립이 눈앞에 온 듯했다. 그러나 6월 30일 노아인(Noin) 전투에서 엄청난 수로 밀려오는 에스파냐군을 만난 나바라 독립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1년 후 1522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가 나바라 독립군을 사면했다. 마침내 1524년 3월 23일 나바라 독립군들이 투항하고, 하비에르의 두 형과 사촌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무너진 성 안쪽 하비에르 가족이 살던 집은 남아 있었다. 

 

하비에르가 열아홉 살이 되던 1525년 하비에르는 무너진 성 안에 나이 든 모친과 형제들을 남기고 파리로 떠났다. 9월부터 파리대학 안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성 바르브 학교(College de Sainte-Barbe)에 다녔다. 하비에르는 1529년부터 프랑스 사부아 출신의 피에르 파브르(Pierre Favre)와 방을 함께 썼다. 하비에르와 파브르는 스물셋 동갑이었다. 하비에르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파브르는 알프스 목동 출신이었다. 하비에르는 아홉 살부터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파브르는 공부는 많이 못 했지만, 새벽 미사 때 들은 강론을 오후에 친구들에게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출중했다.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1529년 10월에 새로 온 학생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그들과 같은 숙소를 사용하게 됐다. 하비에르는 이냐시오보다 열다섯 살이 어렸다. 하비에르와 이냐시오는 같은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지만 8년 전 하비에르 가문은 프랑스 편에서, 이냐시오는 에스파냐 편에서 싸웠다. 파브르는 이냐시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쳐주었고, 이냐시오는 파브르에게 영신 사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파브르는 오래지 않아 다른 영혼을 구하자는 이냐시오의 열정에 공감했다. “어서 사제가 되라”는 이냐시오의 조언도 확신에 차서 받아들였다. 

 

하비에르는 파브르보다 활기차고 굳은 성격 탓에 이냐시오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가 다른 학생들을 회심시키는 것에 냉소적이었다. 어느 날 파브르가 가족 방문을 위해 숙소를 떠났을 때 방에는 하비에르와 이냐시오만 남았다. 세속적인 야망을 추구하던 하비에르는 “이제까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라”는 이냐시오의 끈질긴 제안을 피할 수 없었다. 1533년 초 이냐시오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마르 8,36)는 말씀을 인용하며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했을 때 하비에르의 마음은 세속적 야망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비에르는 자신의 회심을 이끌었던 이 성경 구절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나중에 그는 이 구절을 자주 편지에 인용하곤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9일, 김태진 신부(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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