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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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3: 윤의병 신부 (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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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6 ㅣ No.486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3) 윤의병 신부(상 · 1889-1950, 납북)


배움의 길 트고 성사 위해 수백리 길 다녀

 

 

소설 「은화(隱花)」. 기해박해 백주년이 되던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잡지인 「경향잡지」에 연재돼 수많은 신자들 심금을 울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군난(窘難) 소설이다. 군난이란 교회 박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박해를 당하는 교회 편에서는 군난이라고 부른다.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 「은화」의 저자 윤의병(바오로) 신부는 1989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골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윤자호(바오로)의 5대손 윤상우의 5남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큰아버지가 사는 진천군 백곡면 용진골로 이사한 의병은 큰아버지 윤상운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그리고 14살 때인 1903년 용산신학교(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윤 신부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이 밖에는 알려진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하지만 순교자 가문으로 후손들이 박해를 피해 흩어져 산 것을 감안한다면 구교우 집안이 그랬듯이 의병도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신학교에까지 입학하게 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윤 신부는 31살 때인 1920년 9월 18일 최종철(마르코)ㆍ김유룡(필립보)ㆍ신성우(마르코)ㆍ신인식(바오로) 부제와 함께 종현(명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윤 신부의 첫 임지는 장호원(현 감곡)본당 보좌였다. 그러나 장호원본당은 관할 구역 가운데 하나인 고마리 공소가 성당을 지으려고 하고 있어서 윤 신부는 바로 고마리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고마리는 괴산군 전역과 보은 진천 청주 일대를 관할하게 됐다.

 

고마리에 부임한 윤 신부는 즉시 성당 건립에 착후,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다. 그러나 '높은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고마리는 깊은 산촌인데다 신자들은 착하고 열심했지만 대부분 옹기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어 이동이 잦았을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고마리본당(현 공소) 60주년을 맞아 옛 성당 터에 세운 윤의병 신부 공적비.

 

 

이런 상황에서 윤 신부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겨 1923년 숭애의숙이라는 강습소를 열었다. 아이들이 늘고 규모가 커지면서 1925년에는 12칸짜리 교사를 지었다. 또 1927년에는 수녀원을 겸한 집을 새로 짓고 이듬해에는 서울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을 초청했다. 수녀 2명이 내려와 6~12살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일본말, 산수,노래, 교리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윤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미 신학교 때부터 위궤양을 앓아 입원 생활을 하기도 한 윤 신부는 고마리본당에서도 종종 아팠던 것 같다. 교통편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20곳이 넘는 공소를 돌아다니다 보니 제때에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위궤양은 점점 더 심해졌을 것이다. 탈진 상태에서 주일미사 강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1931년 부활절 직후에는 서울에 올라갔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뮈텔 주교가 수녀들과 함께 윤 신부의 회복을 위해 9일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다행히 병세가 호전돼 윤 신부는 휴식 후 괴산으로 돌아왔지만 거듭되는 과로 때문이었는지 그는 이번에는 폐렴을 앓게 된다.

 

결국 윤 신부는 1932년 9월 첫임지인 고마리를 뒤로 한 채 요양을 겸해 행주본당(현 의정부교구 행주본당)으로 전임됐다.

 

한편 고마리본당은 후임 정원진 신부가 1936년 본당 소재지를 증평으로 옮기면서 공소로 격하됐다. 그러나 윤 신부를 기억하던 신자들은 고마리본당 설정 60주년이 되던 1980년 윤 신부를 기리는 공적비를 옛 성당터에 세워 윤 신부의 업적을 이렇게 기렸다.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시어 사제관도 없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러다 신자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이 지방을 잘 파악하시어 숭애의숙 사립학교를 건립하시어 이 지방 사람들은 물론 타 지방에까지 배움의 길을 터놓으셨으며, 지방 발전은 물론 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남기셨다. 이리하여 남녀 문맹자가 없는 마을 하면 이곳이라는 말까지 말까지 듣게 되었다. 윤 신부님께서는 수백 리를 고행으로 판공을 다니셨으며 이 밖에도 신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평화신문, 2009년 12월 20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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