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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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13: 윤의병 신부 (하) 순교 신심과 필력이 빛났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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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1-06 ㅣ No.489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13) 윤의병 신부(하 · 1889-1950, 피랍)


순교 신심과 필력이 빛났던 목자

 

 

행주본당에서 2년 남짓 지내면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된 윤의병 신부는 1935년 1월 황해도 은율본당 제8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윤 신부는 사목자로서 전성기를 지내게 된다. 하지만 윤 신부가 일제말과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겪고 피랍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은 곳 또한 은율이었다.

 

윤 신부는 1936년 부활절을 전후해서 서울에 있는 5촌조카 윤형중 신부를 초청, 일주일 동안 전신자 피정 겸 재교육을 시켰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 강연회도 마련했다. 이런 노력으로 본당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윤 신부는 나아가 그해 11월 11일 성당 구내에 유치원 겸 회관으로 사용할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을 지어 성대하게 축복식을 거행했다. 황해도 갑부인 홍성숙씨 아들 홍세뢰(필립보)씨가 1만2000원이라는 거액을 성당에 기증해 지은 건물이었다.

 

편모슬하에서 자수성가해 대지주가 된 홍성숙씨는 한학에도 박식한 문장가였다고 한다. 자신은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들을 비롯한 가족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여서 윤의병 신부가 오기 전부터 은율성당은 이들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윤 신부 역시 어려서 한학을 배운데다가 한시에도 조예가 깊어 고마리본당에 있을 때부터 시를 많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연유 등으로 윤 신부는 홍성숙씨와 교분을 맺게 되고 홍성숙씨는 1936년 1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임종했다.

 

부친이 선종한 후 아들 홍세뢰씨가 거금을 성당에 기부한 것은 윤 신부와의 이런 관계가 작용했으리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홍세뢰씨는 이 건물과는 별도로 사제관을 지어 기증하기도 했다. 지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서양식 벽돌 건물, 대중강연 등은 은율 지역에 천주교회를 알리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기해박해 100주년인 1939년은 한국 천주교회로서도 뜻깊은 해였지만 윤의병 신부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바로 그해에 윤 신부는 경향잡지에 자신의 첫 소설일 뿐 아니라 한국의 첫 군난소설 또는 순교소설인 「은화」를 '죽총(竹叢) 바오로'라는 필명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총은 윤 신부의 아호다.

 

병인박해를 시대적 배경으로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경기도 일원을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 「은화」는 경향잡지 1939년 1월호부터 윤 신부가 피랍되기 직전인 1950년 6월호까지 무려 125회에 걸쳐 연재되며 수많은 신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윤 신부가 순교소설을 그 긴 기간에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를 좋아하고 문장에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순교자 후손으로서 틈나는 대로 순교자들의 행적을 더듬어 상당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윤 신부는 고마리본당에 있을 때부터 "군난을 겪은 노인들을 만나면 그 체험담을 유심히 들어 두었고 어떤 깊은 산속에 군난 때 교우들이 숨어 있던 굴이 있다면 바쁜 중에도 틈을 내어 그곳을 가보았다"고 조카 윤형중 신부가 회고한 바 있다.

 

윤 신부의 소설 「은화」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1977년에 새롭게 빛을 보게 된다. 황해도 은율본당 출신으로 윤의병 신부가 신학교에 보낸 이계중(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자비를 들여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후 이 책의 판권을 물려받은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07년 상ㆍ하 2권으로 된 이 책의 제5판을 간행,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 신부는 1939년 6월에는 구월산에서 대대적 순교자 현양 행사를 열어 순교신심을 고취시켰다. 구월산은 은율에서 동쪽으로 4km 남짓 떨어진 곳으로 박해시대에 신앙 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

 

윤 신부의 순교 신심은 각별해서 은율본당에 재임하면서 병인박해 순교자 이달회(베드로) 등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순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사제관에 신자들을 모아 놓고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려주어 신자들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와 해방 직후의 어려운 상황을 거치면서 윤 신부는 또 다른 큰 기쁨을 맛보았는데, 자신이 신학교에 보낸 두 젊은이가 한날 한시에 같이 사제직에 오른 것이다. 1946년 11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전덕표(안드레아, 1921~1950) 신부와 이계중(요한) 신부였다. 이계중 신부는 수품 후 서울 중림동보좌로 부임하는 바람에 다시는 은율본당을 찾지 못했지만, 전덕표 신부는 사리원본당 보좌로 부임해 이듬해 은율본당을 찾아 아버지 신부인 윤 신부와 교우들과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신부는 6ㆍ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해 10월 공산당에게 피살됐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윤 신부도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본당에 머물면서 남하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해 사목하고 「은화」 원고를 집필하면서 지내야 했다. 윤 신부의 안전을 염려한 교우들이 윤 신부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윤 신부는 끝까지 성당을 지켰다.

 

1950년 6월 24일 새벽 2시쯤 윤 신부는 공산당들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새벽녘에 윤 신부를 시중들던 여교우가 사제관에 가보았으나 윤 신부가 사라진 것이었다. 신자들은 주일미사도 드리지 못한 채 윤 신부 행방을 수소문한 결과 정치보위부 유치장에 수감돼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후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소설 「은화」가 미완으로 끝났고 윤 신부의 생애 역시 완결되지 않은 채 끝났다.

 

※ 이 기사는 「황해도 천주교회사」와 「이계중 신부 회갑 기념문집」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평화신문, 2010년 1월 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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