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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의 해: 선종완 신부 (중) 일생을 철저히 말씀 따라 산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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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2-20 ㅣ No.497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II] 1. 선종완 신부 (중) 일생을 철저히 '말씀' 따라 산 사제

 

 

선종완 신부가 단독으로 번역 발행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 선 신부는 일반 교우들이 성경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성경 번역에 뛰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던’ 1942년 늦겨울, 용산 예수성심대신학교 성당에서 2명의 부제가 ‘생명을 일으킬’ 사제로 서품됐다. 춘천교구 소속의 선종완 신부와 서울교구 소속의 박성춘 레오 신부였다.

 

서품식에서는 단연 선 신부의 다재다능함이 화제가 됐다. 실제로 선 신부는 신학교 시절부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한때는 성 음악에 깊이 매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손가락 때문에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해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현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인 최승룡 신부는 신학생 시절(1967년) 스승이신 선종완 신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신부님의 손가락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성경분야는 아직도 암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겨우 한 옥타브밖에 못 짚으시는 그 손가락이 한국 천주교회에 얼마나 큰 다행인지.”

 

음악만이 아니었다. 학문, 특히 어학 분야의 재능은 놀라웠다. 사실 재능이라기 보다 땀과 노력의 결실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선 신부는 지독한 공부벌레였다. 성서를 공부하려는 그의 집념은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라틴어와 불어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었지만 히브리어는 가르치는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 신부는 일본 서적상을 통해 히브리어 및 희랍어 사전, 문법책을 직접 구입해 혼자서 독학했다. 그 결과 철학과 과정을 마칠 즈음에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읽을 수 있었으며, 신학과정을 마칠 즈음에는 희랍어 원문 성경을 줄줄 읽어 내려갈 정도가 됐다.

 

영성도 남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수도자라고 불렀다. 실제로 선 신부는 1938년 3월 철학과를 수료한 뒤, 일본 북해도의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지원하려고 했지만 주위 만류로 그 뜻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진학했다. 유학 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당시 제자 신학생들은 선 신부를 이렇게 기억했다.

 

“학자적인 기풍보다는 수도자적인 내적 자세가 더욱 돋보이던 분이었다. 성서의 총괄적인 중심 사상은 인간의 구원이며 이 구원은 오로지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고 역설하면서 구약성경의 그 폭넓은 역사와 내용을 신념과 조심성을 갖고 강조하였다. 학자적인 유식한 문체나 화려한 수식어도 없었지만, 강의는 단순하고 소박한 그분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선 신부는 사제 수품 1개월 후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한국교회 해외 유학생으로 로마로 유학, 울바노 대학과 로마 성서대학, 예루살렘 성서연구원 등에서 성서와 고고학 등을 수학했다. 선 신부의 로마행에는 당시 신학생이던 황민성, 유영도, 백남익, 박양운 등이 함께했다.

 

1952년 한국으로 돌아온 선 신부는 그해 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됐으며, 1955년 구약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증언들이 있다. 동료 교수였던 오기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에 그가 보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그것이 좋거나 그르거나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일생을 성서 안에서 살았다. 모든 생각과 말, 행실, 모든 것을 성서에 준한 철저하게 성서에 미친 사람이었다.”

 

정확한 연도는 기록이 남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선 신부는 본당 사목 체험을 위해 약 6개월간 춘천 소양본당에서 사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선 신부는 신자들이 놀랄 정도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 신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처럼 느끼며 가책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 동료 교수 신부인 오기순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제 선 라우렌시오 유물관’에 전시중인 인쇄판. 선 신부가 성서 번역을 할 때 쓰던 것으로 이 인쇄판을 통해 한국어 성경이 탄생했다.

 

 

“나는 성서를 파고들 줄만 알았지, 어떻게 일반 교우들에게 설명해 주고, 어떻게 생활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지 가르치지 못해 후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서에서 파낸 것을 모든 교우들에게 깊이 묻어 주고 싹 틔워, 교우들이 성서답게 생활하고 성서답게 마음먹고, 성서답게 행실하고, 성서에 실린 것을 원하고, 성서를 무기로 삼아 세상을 거슬러 싸울 수 있도록 신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배운 새 신부들이 일선 본당에 나가서 먼저 살아가도록 해야만 되겠습니다.”

 

이후 선 신부는 독자적으로 성경 번역에 뛰어든다. 당시 한국교회는 한글 신약성경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910년 4복음서가 번역되었고 1941년에 서간편이 번역되었으나 구약성경은 아직 번역할 꿈조차 못 꾸고 있었다.

 

선 신부는 혼자 힘으로 구약성경 번역이라는 엄청난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당시 화폐가치로 연 100만 원에 달하는 번역·발간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요원했다. 그래서 선 신부는 당시 붐을 이루던 메추라기를 사육한다.

 

선 신부는 새를 좋아했다. 카나리아 등 새들을 수십 쌍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메추라기 사육 붐이 일었다. 당시 달걀 한줄 값이 110환이었지만 메추라기알은 170환이었다. 막 부화기에서 나온 새끼 한 쌍이 2000~3000환이었고, 알을 낳을 수 있는 암컷은 1만 환에 가까웠다.

 

새를 키운 경험이 있던 선 신부는 본격적으로 신학교에서 메추라기 사육에 나선다. 심지어 자신의 방에 부화기까지 설치하기도 했다.

 

선 신부에게 메추라기가 많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수 신부들은 물론 신학생과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까지 메추라기 새끼를 얻어가기 바빴다. 이러한 선 신부의 메추라기 사육은 소문이 퍼져 당시 일간지 사회면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메추라기의 도움(?)으로 1958년 6월 30일 우리말 ‘창세기’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의해 발간된다. 하느님께서 최초로 우리말로 창세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선 신부의 뼈를 깎는 노력과 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창세기 이후 구약성경 번역은 더욱 탄력을 받고 진행된다. 1년 뒤에는 출애굽기(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이사야 등이 번역되었으며, 1963년에는 예레미야 등 예언서들이 번역되었다. 오기선 신부는 선 신부의 선종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창세기부터 10여 권의 번역물이 출간되기까지는 메추라기 울음소리가 그 모두를 뒷받침했다고 봅니다. 신부님! 그래서 그런지 그때 번역하신 창세기 첫 장을 열면 지금도 메추라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10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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