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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노병조 안셀모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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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언] 노병조 안셀모 신부 Testes fidei - 시복 추진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6명, 연길 수녀원 소속 사제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신앙의 증인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1921년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그를 원산 대목구 부감목(副監牧, 총대리)에 임명하였다. 원산 대목구 소속신학생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여 숭공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1921년 11월 3일에 소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안셀모 신부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서울 수도원 원장을 맡고 있던 김시련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imid, 金時練, 1883-1962) 신부가 수도원 이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원산 본당 주임으로 발령 나자, 안셀모 신부는 원장직까지 수행해야만 했다. 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그는 1926년 3월에 간도(間島)에 있는 본당들을 순방하였고, 훈춘(琿春)과 육도포(六道泡) 본당에서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926년12월 초부터 시작한 새 수도원과 신학교 건축공사가 마무리 되자, 1927년 11월 17일 서울 수도원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덕원으로 옮겨 갔다. 수도원 옆에 지어진 새로운 신학교는 1927년 12월1일에 성 빌리브로드를 주보로 삼아 축복식을 거행하고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안셀모 신부는 신학교만 전담하게 되었고, 부감목과 원장 직책은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맡았다. 1929년 8월 중순 그는 6주 동안 일본을 방문하여 피정을 한 후 당시 일본 가톨릭의 중등학교를 둘러보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는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신부, 탁세영 파비아노(Fabian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와 함께 원산대목구 대표로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1년에 개최된 전선주교회의(全鮮主敎會議, 지역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안셀모 신부는 북한 공산 당국에 의하여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하여 신학교 교장을 맡아 보면서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는 신학생들의 학업, 영성, 건강 등을 꼼꼼하게 돌보았으나, 신학교 생활을 일일이 감독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는 우울했던 학생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곤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성가대장으로 수십 년을 봉사했기 때문에 모든 성가를 외우다시피 했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성가연습을 지도하면서 “몰라서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에서 연습시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음악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음악활동을 권장했다. 그 때문에 여가 시간이 되면 신학교 전체가 악기 소리와 성가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8·15 광복 후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1949년5월 9일에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홍태화 루치오 원장신부, 부원장 안세명 아르눌프(Arnulf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길세동 루페르트(Rupert Klingseiz, 吉世東, 1890-1950) 신부 등이 체포되자 그는 수도원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5월 11일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자강도 전천군(慈江道 前川郡)에 위치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의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 날로 쇠약해진 노 안셀모 신부는 설사병과 수종(水腫)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51년 11월 9일 사망하여, 옥사덕 수용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묻혔다. * 자료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 교회사 연구소), Necrologium(왜관 수도원),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 사진제공 - 역사자료실 [분도, 2008년 겨울호] 0 1,34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