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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로운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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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14 ㅣ No.523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새로운 복음화’



우리는 지금 ‘신앙의 해(2012. 10. 11-2013. 11. 24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막바지에 서 있습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이 ‘신앙의 해’는 현대의 ‘신앙인’들이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극복을 목적으로 현재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되묻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복음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목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교구를 비롯하여 세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은 ‘신앙의 해’를 선용하여 ‘신앙의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해 함께 하였으며, 이를 위해 필자 또한 부족하지만 11회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지면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약 1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이 글이 계속 지속되어야 할 우리 신앙의 재발견 여정에 하나의 조그만 촉매제로 쓰였기를 바랍니다.

이번 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의의를 간략히 요약하고 이어서 ‘새로운 복음화’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연재의 마무리를 짓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29)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교회 정체성의 재발견과 미래에 대한 희망

우스갯소리로 ‘성경’을 짤순이(탈수기)로 돌리면 ‘사랑’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짤순이로 돌리면 무엇이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라는 말, 다시 말해 재발견된 ‘교회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만큼 ‘교회 자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봤던 공의회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이전 공의회들은 한편으로 교의적(敎義的)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등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소집되어 ‘특수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고 방어하기 위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황에 따른 개별사안에 대한 논의를 넘어 교회 본연의 모습, 바로 교회 자신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칫 현실적인 사안들과 문제들에 둘러싸여 놓치기 쉬운 ‘교회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그를 통해 ‘현재’의 문제들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원론적(原論的)이고 사목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 전례, 교회, 사목헌장 등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이라는 성과물을 우리에게 전해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은 21세기에 서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그 가치나 광채가 전혀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옳게 읽혀야 하며, 나아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중요한 규범적 문헌들로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입니다.
 

2.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친교의 증언과 확산 = 복음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된 구원 계획’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친교의 신비’인 ‘교회’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그 안에 불려진 ‘하느님 백성’으로서 우리 자신(우리 신앙인 모두)을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때때로 부족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재 교회의 외적인 모습과 그 안에 ‘질그릇’ 같이 존재하는 ‘교계제도와 법’과 같은 단편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세상에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고 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을 바라보면서(LG 1-4 참조) 교회의 성사적 특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재숙고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나누게 되는 깊은 ‘결합(친교)’을 드러내고, 그와 동시에 온 인류를 그 ‘일치(친교)’로 이끌어야 하는 표징이며 도구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음을 재발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친교 교회론을 조금 쉽게 풀자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하느님과의 친교’를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모든 신앙인들도 비로소 세상에 자신이 나누는 그 ‘친교를 증언하고 확장’시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앞서 보았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2)-(3)과(8)-(9)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친교’라 함은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인들의 이중적인 참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나 이상(理想)만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친교는 모든 신앙인들의 살아 숨쉬는 삶의 반영으로 교회 안에서 (특별히 ‘성사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또 그 일치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 생겨나는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인의 ‘신원’이 드러나며 존엄성이 밝혀지는 ‘복음화의 장소(locus evangelizationis)’입니다. 이렇게 모든 신앙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나누는 친교는 ‘복음화의 장소’로 또 다시 세상 안에서 친교를 낳기에(확산시키기에) 다분히 선교적(복음 선포적)일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선교(복음 선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친교의 증언과 확산’인 복음 선포와 선교는 모든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사명이자 본성이지, 단순히 교세(敎勢)의 확장정도로 평가 절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교회의 친교 안에서 살아가고 성장할 때(복음화 될 때) 교회 자신은 비로소 스스로의 구원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구원을 위한 친교 공동체’로 건설되어 그리스도와 더욱더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3. 새로운 복음화 = 개인의 성덕 추구에서 더욱더 성숙한 친교의 교회 공동체 형성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명시적으로 ‘새로운 복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친교 교회론’의 재발견은 ‘복음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새로운 복음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실제로 ‘새로운 복음화’라는 새로운 용어는 1980년대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합니다.<1983년 3월 9일 아이티(Haiti)의 포르토 프랭스에서 개최된 제19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정기 총회(CELAM)> 그렇지만 이는 그분의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각 개인과 온 교회의 생활에 되도록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쇄신된 투신”이 바로 ‘새로운 복음화’에 부합한다고 명시적으로 천명하듯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의 실현과 연관된 것입니다.

비록 여기서 ‘쇄신된 투신’이라는 말은 그 당시까지도 교회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항상 새롭게 구현해 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공의회 이후 역사 안에서 교회는 공의회로 재발견된 친교의 교회론을 실현하기 위해서 꾸준히 ‘교회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실례로 교회는 이런 친교 교회론의 맥락으로 신앙인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성덕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삶 안에서 공동체적인 신앙관을 가질 것을 고취하기도 했으며(‘소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노력, 본당의 소형화, 사회정의에 대한 사회윤리의 강조 등), 교회 안에서 다각적인 평신도의 참여와 세상 안에서 그들의 특수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였고(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활성화, 평신도 신앙교육을 위한 다양한 기회들, 성직자 평생교육, 사회복지 활동 등),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지역교회의 역할과 책임(지역 주교회의의 강화, 교구 시노드, 대리구제 등)을 지금까지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발전과 원활한 운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모습’을 살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안에서 ‘모든 신앙인’이 복음화의 장소인 친교를 통해 더욱더 세상을 향해 ‘성숙한 친교의 교회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전방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해’의 소집과 그 필요성 자체가 시사 하듯 아직도 그런 과정 안에는 세상 전체의 구원을 위한 진정한 ‘누룩’이 되기 위해 신앙인과 교회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할 더 많은 포기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나아가 단순히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성령께 간구하며 쇄신되고 변화해야 하는 당위성도 상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복음화는 무엇보다도 ‘바로 나 자신부터’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 안의 친교에로 부르시는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그 안에서 성장하고 나아가 그분에게 도구로 나를 항상 새롭게 내어 드리려는 ‘적극적인 응답’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 신앙의 여정에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3-4)

*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는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유익한 글을 써주신 최석환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3년 10월호, 최석환 요셉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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