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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지상의 평화는 불가능한가?: 초국가적 거대 탐욕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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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30 ㅣ No.1084

[경향 돋보기 - 지상의 평화는 불가능한가?] 초국가적 거대 탐욕을 경계하라


2001년 9·11테러공격, 같은 해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2006년 이스라엘-헤즈볼라 간 레바논 전쟁, 이란의 핵개발에 따른 긴장. 교통과 통신의 발전으로 세계가 더욱 가까워진 ‘글로벌 빌리지’의 21세기에도 평화와 공존의 분위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서방 강대국의 첨단무기에 대항하는 자살폭탄테러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정전 60년인 올해 북한은 추가적인 핵실험을 감행하고, 미사일과 핵무기로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다. 일본은 왜곡된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며 주변국과 갈등을 야기하고, 중국도 자원을 차지하려고 일본과 센카쿠(댜오위다오) 그리고 한국과 이어도 분쟁을 지속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31일 즉위 후 첫 부활미사에서 전쟁과 폭력을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이룰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이날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말리, 나이지리아 등 중동아프리카 지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한반도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갈등 종식과 화해의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원했다.

교황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쉽게 얻으려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갈라져 있다.”면서 “이것이 21세기의 노예를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탐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각국 권력자들의 탐욕이 있고, 국제적 거대한 탐욕이 있다.


권력자들의 탐욕

인류의 비극에는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인 권력자들이 자주 보인다. 히틀러의 권력유지를 위한 오판은 수백만의 사람을 희생시켰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세력의 대립이 실제로 많은 내전과 전쟁을 일으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베트남 전쟁도 두 거대 정치세력이 극한적인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고자 집권 다음해인 1980년 이란을 침공했다. 8년간의 전쟁으로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으로 진 빚을 탕감받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자 1990년 쿠웨이트도 침공했다. 개인의 정치적 야욕은 결국 2003년 다국적군의 공격을 가져왔고, 본인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를 유지하려고 9·11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 라덴을 옹호하던 탈레반 정권도 2001년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붕괴됐다.

권력의 집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도부는 바로 북한에 존재한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유일무이하게 권력을 3대째 대물림하고 있는 정권이다. 국민은 세계에서 거의 가장 낮은 수준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지도부의 관심은 권력과 기득권 유지다. 수십만 명이 아사상태에 있는데도, 막대한 재원을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에 투입하고 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정 시스템에서는, 자식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것은 정통성이 결여된 행위다. 이에 대한 불만을 차단하려면 세뇌와 억압통치 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정치적 폭정까지 겪어야 하는 것이 북한주민의 현실이다.

따라서 2011년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중동의 정치변동은 북한에 분명히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지도자를 ‘아버지’ 또는 ‘수령’으로 칭하도록 국민을 세뇌하는 북한의 정치행태는 아랍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현재까지 정권이 붕괴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의 공통점은 공화정이면서도 자식에게 권력세습을 시도하고 있던 나라들이었다. 2년째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는 중동에서도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이 집권하고 있는 공화정이다.


세계평화 위협하는 거대한 탐욕

전쟁과 갈등의 배후에는 독재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독재자 배후에는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냉전시대의 갈등구조였다. 제3세계에서 발생한 여러 분쟁에는 소련과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양대 세력의 이념적 경쟁 아래 많은 제3세계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의 많은 분쟁에서 소련과 미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 또는 확대하려고 분쟁에 깊숙이 개입했다.

극단의 예는 1979년에서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내전’이다. 사회주의 성향의 아프간 집권당은 국내의 혼란이 거세지자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이 대군을 파견하고 더 친소련적 정부를 아프간에 구축하면서 발생한 10년간의 내전이었다.

냉전시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대외전략, 소련의 남하 억지전략에 구멍이 난 것이다. 1979년 초 이란의 이슬람혁명으로 중동 내 가장 중요한 전략거점을 상실한 미국은 소련의 아프간 점령에 더욱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이 결정한 정책은 ‘프락치 전쟁’이었다. 거대세력 소련과 직접 대립하기보다는 아프간 내 반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무자히딘(성전 수행자)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 정권과 알-카에다의 등장이 여기서 시작된다.

전 세계 이슬람권에서 자원한 이슬람전사들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항공을 이용해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항공료의 90%를 할인받았다. 아프간의 대소련 성전에 실질적으로 돈을 댄 국가는 사우디였다. 파키스탄에 집결한 이들 자원병들은 미군 교관 또는 이들로부터 훈련을 받은 파키스탄 정보부 교관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사우디가 구입한 M16 소총, 스팅거 견착식 미사일 등 미제 무기들로 무장했다.

군사훈련으로 끝나지 않았다. 막강한 소련군과 맞서고자 온갖 테러 기법이 전수됐다. 도로매설폭탄, 사제폭탄 제조와 설치 등의 다양한 방법이 전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기법은 나중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미군 주둔지역에서 사용된다. 1989년 소련이 결국 아프간에서 철수했지만, 성전에 가담한 무자히딘들은 자국으로 귀국하지 못한다. 군사훈련을 받았고, 실전경험을 가졌고, 이념적으로 무장되었고, 소련에 대한 성전 승리의 자신감까지 가진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대부분의 중동국가들은 꺼렸다.

이처럼 귀국하지 못하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기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알-카에다를 창설한다. 알-카에다의 뜻은 ‘기지’다. 대규모 민간인 테러라는 새로운 국제평화의 위협요소는 이처럼 강대국의 이념적 갈등 속에 등장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도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이 명분이었지만, 전쟁 이후 미국 등이 주장하던 것들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후세인 정권이 테러세력을 지원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21세기에도 5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명분도 없는 전쟁으로 학살당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전후 많은 학자들이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미국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미국 내 3대 로비세력, 곧 에너지, 군수, 그리고 유다인 로비세력이 전쟁과 점령의 배후였다는 것이다. 중동은 세계 최대 에너지 공급처, 최대 군수시장,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있는 곳이다.


종말로 다가가는 권위주의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 국가 내 권력자들의 탐욕은 설 땅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거리가 멀었고 독재가 만연했던 아랍에서도 이른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정치변동이 발생하고 있다. 아랍의 시민혁명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중동이 21세기까지도 과거의 전통을 계속 유지했던 이유는 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유달리 다른 문화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유목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물리력 또는 무력에 따른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다. 유목민들은 정착문명과는 달리 생사를 결정하는 우물 또는 오아시스를 보호하고자 무장을 해야 했다. 남성이 칼을 지니는 것은 당연했고, 유사시에는 우물과 재산을 지키느라 모두가 나가 싸워야 했다. 전투를 위한 명령체계까지 갖춘 강력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필요한 사회였다. 가장 강한 가문 또는 집안의 남자어른에게 모든 지도력과 권력이 주어졌다. 부족원은 부족장의 명령과 권위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지도자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 아버지에게 도전하는 것은 터부시돼 왔다.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도 권위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다. 창시자 무함마드의 독특한 지위에 기인한다. 이슬람은 중동의 다른 양대 종교 곧, 유다교 그리고 기독교와는 태동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모세와 예수님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적 사명을 마치고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의 역할은 알라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종교를 정착시키는 데 끝나지 않았다. 그는 메카에 입성해 이슬람 공동체를 만들고 이슬람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약 2년간 통치하고 사망했다.

그는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지도자였다.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무함마드는 국가를 유지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장치를 만든다. 따라서 이슬람은 일종의 통치철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또 국민의 삶을 통제하는 데 용이한 생활종교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보도록 규정한 것도 국민의 삶을 이슬람의 통치철학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슬람은 권력과 권위주의를 유지하고 사회와 개인을 통제하는 데 정치적으로 가장 동원하기 쉬운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번 아랍권 시민혁명은 유목민의 남성 중심 가부장주의와 이슬람 종교의 권위주의에도 적잖은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특히 위성TV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21세기 새로운 시민혁명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혁명과는 달리 ‘지도자가 없는 혁명’이 아랍권 전역으로 확산하는 것이다.

30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시도했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18일간의 평화적 시위에 무너졌다.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소통수단이 시민의 손에 쥐어지면서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권이 더 이상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시민 간 소통수단의 발달은 아랍권뿐만 아니라 전 세계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아직도 권위주의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의 시민들의 주권의식을 고무시킬 것이다. 그 파장은 21세기 유일한 3대 세습 공화정체제인 북한에까지 언젠가는 이를 것이다. 물론 인터넷, 이동통신 등의 확산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중세에도 있었던 관용과 용서

SNS를 통한 권위주의의 붕괴로 한 국가 내 독재권력에 따른 갈등과 분쟁은 점차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1세기 세계화시대에 더 심각한 문제는 초국가적 거대 탐욕이다. 통제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인류 전체에 관용과 용서의 마음을 확산시키는 대대적인 캠페인만이 거대 탐욕을 감소시키는 해결안일 것이다. 과거 인류의 역사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전통적인 평화유지 방안이었다. 21세기를 살아나가면서도 우리가 돌이켜보며 배워야 할 사례들이 적지 않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벌어진 십자군 원정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쟁에 따른 희생자는 수백만이 넘는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폭력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사자왕(獅子王)으로 알려진 유럽의 리처드 1세(1157-1199년)에 맞선 이슬람세계의 영웅 술탄 살라딘(살라훗딘, 1138-1193년)이 보여준 용서와 관용의 정신은 인류가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187년 이스라엘 북부 히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슬람 대군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싸워 기독교 군을 격파한다. 3만여 명의 병사가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은 결국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예루살렘 왕에게 살라딘은 직접 물을 따라 주며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다.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거점을 둔 기독교 왕국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이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90년 만에 기독교의 수중에 있던 성도를 되찾은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의 첫 명령은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정복’이었다. 포로를 처형하는 일이 없었다. 기독교인 부상자들을 정성껏 돌봤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살라딘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살라딘이 남편을 찾아달라는 여인과 함께 울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유럽의 일부 학자들이 살라딘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정복자’라고 칭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 회복을 외치며 출정한 리처드 1세와의 전투에서도 아량을 잊지 않았다. 전투 중 리처드가 낙마했을 때 살라딘은 새 말을 보내주었다. 리처드가 고열에 시달렸을 때는 열을 내릴 수 있도록 눈을 선물로 보냈다. 비록 적군의 수장이었지만 살라딘의 이름이 먼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된 중요한 일화들이다.

“오늘날에도 건너야 할 사막이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 우리 안에 사막이 생겨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미사 강론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중동의 사막에 평화가 오도록, 그리고 21세기 인류의 마음속에 등장하고 있는 ‘사막화’ 현상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전파다. 사랑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관용과 용서를 베풀 수 있다.

* 서정민 -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 이집트 카이로아메리칸대학 정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앙일보 카이로 특파원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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