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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간추린 사회교리: 환경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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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948

[간추린 사회교리]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 환경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관점


멈추지 않는 에덴 파괴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재산을 임금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1열왕 21장).

구약의 아합왕은 이즈르엘 출신 나봇의 포도원을 사들여 왕실의 정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적당한 금전적 보상과 원한다면 대체 부지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나봇은 조상대대로 전해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에 살아있는 권력은 그를 고발하면서 한 개인과 집단에게 힘을 제공해 주신 하느님과 국가를 대변하는 임금을 저주하였다는 논리를 편다. 결국 나봇은 돌팔매질을 당해 죽고 그 토지는 권력의 소유가 된다.

이런 현실은 현재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으며 그 참상은 더욱더 처참하다. 경제발전과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미래세대의 권리까지도 착취하는 환경파괴가 그 현장이다.

자연을 담보로 한 경제개발과 산업화는 생활의 편리함과 윤택함을 제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환경파괴를 유발해 인간의 생존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90%가 넘는다고 한다.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는 소멸되었고, 교통난, 쓰레기처리 문제, 식수와 하수 문제, 대기오염, 소음, 에너지 문제, 주택난 등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재정수입의 확대를 노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난개발로 전국이 공사장화된 지 오래다.

생태계를 담보로 한 풍요는 결국 생태계의 위기를 불러오고, 동시에 소유와 분배의 양극화를 통해 사회불안을 가져온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된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지금 신앙인들은 어떻게 환경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죽음으로 치닫는 현장들

신명기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살려면 생명을 택하라고 명령하신다(30,19 참조). 하지만 인간의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죽으리라는 경고에도 ‘선악과’를 먹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다. 그 이후, 특히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전 인류 역사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죽음의 행위를 스스럼없이 선택해 왔고, 급기야는 그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도달하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경우, 총 공사비 6조 원 소요에 2006년 방조제 물막이공사 이후 2011년 현재까지 총 공사비의 2배가 넘는 비용이 수질개선비로 사용되었고, 추후 계속 지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수많은 국민들의 저항에도 편법과 탈법으로 강행한 4대강사업은 애초 우려했던 바와 같이 22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었음에도 수질은 오염되고, 홍수의 위험은 더욱 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해에서 일어난 지진과 거대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사고가 있었음에도 핵발전소 확대정책을 펴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우리나라와 세계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거대자본과 개발을 지상과제로 삼은 정치권력의 태도에서, 탐욕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이들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다. 모든 이웃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와도 함께 공유해야 될 피조세상의 자원과 환경을 이익추구의 대상만으로 생각하는 자본가들과 권력의 모습에서 그 옛날 어리석었던 인류의 모습을 발견한다.


신앙인의 성찰

신앙인에게 자연은 단순한 삶의 환경이 아니다. 우리는 이 자연을 창조주의 거룩한 숨결이 서린 ‘창조’ 그 자체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인간의 피조성)인 동시에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하느님 모상성)를 하느님께 부여받은 존재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인간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위탁받음으로써 특별한 책임을 갖게 되었다.

“땅을 지배하여라.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피조물인 인간을 하느님의 일꾼이요, 협력자로 격상시켜 주신다. 이로써 인간은 착한 청지기로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며 지속적인 창조행위에 함께하는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보전하여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줄 책임 또한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완결된 상태가 아닌 진행형이다. 모든 만물은 출현과 소멸을 통해 완전에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체험하게 된다.

“모든 피조물은 실제로 하느님 영광의 현현입니다. 특별히, 인간(살아있는 인간)은 하느님 영광의 현현이며,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제삼천년기」, 6항). 하늘과 땅의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현현을 드러내는 성사인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 의도는 인간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아왔다. ‘소유’와 ‘소비’를 마치 ‘선’인 양 착각하는 인간의 잘못된 의지와 선택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를 심각하게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인간이 딛고 사는 세상(땅)은 “너(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세 3,17 참조). 자연이라는 이름의 ‘생태계’는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전 인류의 자산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으나, 인간은 자연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생태정의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창조질서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한 생태정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생태정의는 소유와 물질 중심의 삶이 아닌 가치 중심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인간이 사는 환경을 파괴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를 방지하고자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하고, 자신과 이웃의 선익을 위해 조화를 완성시킴으로써 창조활동을 완성시킬 책임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37-344항 참조). 이것은 검소한 생활양식과 가난한 이들과 미래세대를 위한 책임있는 생활양식으로 가능해진다.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새로운 선택

교회는 전통적으로 복음적 권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삶의 지표를 찾아왔다.

‘청빈의 덕’은 물질은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정신은 풍요롭게 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청빈의 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게 된다. ‘순명의 덕’은 자신의 욕구 충족에만 집착하지 않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이웃, 다른 피조물들의 요구에도 귀 기울임을 배우게 한다. ‘정결의 덕’은 영적 열매의 전제조건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더 자유롭게 봉사하고 투신하도록 인간을 이끌어준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적 권고에 기초하여 우리 자신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의 관계를 직시하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여야 한다.

태초부터 인간의 범죄는 하느님이 아닌 물질을 삶의 중심에 놓은 결과였다. 하느님께 가는 여정에 필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인 물질이 어느 순간 목적이 되어버린 인간의 삶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향했고, 결국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 이웃을 착취하고 생태계의 뭇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미래를 위협하였다. 창조질서 회복과 보전은 이런 탐욕으로 인한 물질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다 모든 것을 잃었던 어리석은 인류는 낙원에서 쫓겨났다.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의 기반이 되는 자연환경과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공생하는 뭇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착한 청지기’로서 하느님의 거룩한 창조행위에 함께하는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살기 위해 생명을 선택하는 유일한 길이다.

* 양기석 스테파노 - 수원교구 신부. 수원대리구 사회복음화국장으로 있으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6월호, 양기석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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