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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땀의 순교자 최양업4: 교우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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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7-07 ㅣ No.927

[창간 23돌 특별기획] 제1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다락골에서 배티까지 (4) 교우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다

 

밤낮으로 교우촌 찾아다니며 '천주가사' 편찬

 

 

"그 때 갑자기 100명이 넘는 포졸들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는 진밭들(현 진밧들)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함께 있던 신자들이 그들의 침입에 완강히 대항해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치우고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산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6년 9월 13일자 열두 번째 서한)

 

 

교우촌 아홉 군데서 서한 집필

 

박해 시대 신앙의 접점은 교우촌이었다. 가느다란 신앙의 맥은 교우촌에서 교우촌으로 이어졌다. 주님의 길을 가로막으려는 박해와 난동이 계속됐지만 최 신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찾아 교우촌으로 향했다. 때로 조선의 알프스라고 해야 적절할 험준한 강원도 산길을 사나흘씩 걷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겹고 고된 길이었다. 때론 기진맥진했다.

 

사목순방의 어려움은 비단 걷는 어려움뿐만이 아니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했고, 공소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어둑새벽 동이 트기 전에 공소를 떠나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은총을 받고자' 이틀이나 사흘씩 걸어와 그리도 간절히 미사성제를 고대하던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지도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에서 허둥지둥해야 했다.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유숙하던 주막에서 쫓겨나 흠씬 매를 두들겨 맞아야 했다. 의복이 찢어져 반쯤 나체가 됐다.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했다.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른 듯 항상 전전긍긍 떨어야 하는 교우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최 신부는 비통함에 젖었다. 그렇지만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돌보고자 최 신부는 항구한 인내로 온갖 간난신고를 극복했다.

 

최양업 신부가 조선으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1850년 10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서한을 쓴 도앙골 교우촌. 이 도앙골교우촌은 현재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도앙골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제공=이승용 신부.

 

 

그렇다면 최 신부가 사목순방차 들른 당시 교우촌은 얼마나 될까. 교우촌 수나 그 구체적 실상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최 신부가 1849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뒤 리브와 신부 등 스승들에게 보낸 일곱 번째 서한부터 열아홉 번째 서한까지 12통(아홉 번째 서한은 분실됨)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최 신부가 직접 서한을 썼던 교우촌은 도앙골 등 모두 9군데다. 최 신부 사목순방지 127곳 가운데 일부다.(최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여덟 번째 서한 참조)

 

이들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가 모두 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그간 교회사학계 연구로 최근 들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우선 최 신부가 조선에 귀국한 뒤 처음으로 1850년 7월 서한(일곱 번째 서한)을 쓴 도앙골은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도앙골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851년 10월 여덟 번째 서한을 쓴 절골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절골로 추정된다. 1854년 11월 열 번째 서한을 쓴 동골은 충북 진천읍 연곡리 동골(쥐눈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일 가능성이 크다. 1855년 열한 번째 서한을 쓴 배론은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이라는 데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최양업 신부가 1858년 열다섯, 열여섯 번째 서한을 작성한 오두재 교우촌은 현재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오도재로 추정된다. 사진제공=이승용 신부.

 

 

그러나 1856년 열두 번째 서한을 쓴 소리웃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상손곡 손골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아직은 어느 지방 교우촌인지 명확하지 않다. 1857년 9월 서한 작성지인 불무골도 충남 서천군 비인면 불모골이라는 설과 충남 서천군 판교면 흥림2리라는 설이 엇갈린다.

 

최 신부가 1858년 페롱 신부와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열다섯, 열여섯 번째 서한을 작성한 오두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오도재(일명 어두재, 오도치)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1859년 열일곱, 열여덟 번째 서한을 쓴 안곡은 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일명 안실)이라는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 신부가 1860년 마지막 편지인 열아홉 번째 서한을 작성한 교우촌 죽림은 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대밭(대재)공소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밖에 멍에목(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진밧들(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만산(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만산리공소), 간월(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동래(부산 동래지역 읍내), 한덕골(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서덕골(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먹방이), 수리산 뒤뜸이(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 산막골(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등 교우촌도 최 신부 서한에 등장하고 있다.

 

 

가경자 선포 소식에 기쁨의 눈물

 

물론 슬픔만, 고통스러움만, 눈물만, 어려움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느님 자비로 사목순방을 별 탈 없이 평온하게 마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그물' 속으로 들어왔다. 한 번에 240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도 하고, 온 동네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사도 있었다. 일가족이 개종해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도 있었다.

 

가장 큰 기쁨은 조선 순교자들이 가경자(可敬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복시성 절차 간소화로 가경자 단계는 폐지됨)로 선포된 소식이었다. 최 신부가 부제 시절에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cta Martyrum)」에 포함된 기해년(1839년) 순교자 73위와 병오년(1846년) 순교자 9위 등 82위가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된 것이다.(1847년 4월 20일자 서한 참조) 얼마나 기뻤는지 최 신부는 "슬픔 중에서도 더할 수 없이 큰 위로가 됐다"면서 "언젠가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식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올 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쁘고 영광된 날이 되겠습니까"하고 반문하면서 감격을 감추지 못한다(가경자 82위 중 79위가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됐다).

 

 

「천주성교공과」도 우리말 번역에 참여

 

최양업 신부가 번역 편찬에 참여한 목판본 「천주성교공과」.

 

 

최 신부의 활동은 교우촌 순방에 그치지 않는다. 밤낮으로 애면글면하며 교우촌을 찾아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을 이용한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한다. 최 신부가 쓴 천주가사로는 현재 '사향가' '선종가' '공심판가' '사심판가' 등이 꼽히고 있다. 물론 "천주가사의 작가는 교회"라는 주장도 있지만, 교회 내 전승이나 각각의 가첩(歌帖)에 드러나는 표현이나 반복 등의 유사성을 볼 때 아직까지는 최 신부의 저작이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최 신부는 특히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며 자신이 직접 천주가사를 저술해 교우촌에 배포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최 신부는 또한 1859년 여름 휴식 기간을 이용해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천주교회에서 최초로 채택한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우리말로 옮기고 교정하는 데도 참여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ㆍ성체성사ㆍ견진성사 등 네 가지 근본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했기에 「사본요리(四本要理)」라고도 불렸다. 이 책은 1864년 서울 목판인쇄소에서 단권 초판이 간행됐고, 1886년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교회 성서활판소에서도 간행돼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최 신부는 같은 해 기도서인 한문본 「천주성교공과」 번역에 들어가 이듬해 여름 이를 완성했다. 1862년 4권 4책 목판본으로 인쇄돼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한국천주교회에서 사용된 이 기도서는 활자로 인쇄된 최초의 천주교회 서적으로, 천주교회가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근원이 된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첫 공식 기도서에까지 최 신부의 숨결이 배어 있는 걸 보면 박해시대 최 신부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우리의 가련한 참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스승님과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께 청하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고 인자하신 하느님께 더욱 간절히 탄원하기를 그치지 마시기 바랍니다."(최양업 신부의 1859년 10월 11일자 열일곱 번째 서한)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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