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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의에 대한 어떤 기록,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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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7 ㅣ No.903

[경향 돋보기 - 너희는 오직 정의만 따라야 한다] 정의에 대한 어떤 기록, 성경


정의(正義)란 ‘바르고(正) 의로움(義)’을 의미한다. 해당되는 성경의 어휘로는 ‘미쉬파트’, ‘체다카’, ‘디카이오쉬네’ 등이 있는데, ‘정직’, ‘정확’, ‘옳음’, ‘바름’, ‘정상적인 것’, ‘자비’, ‘구원’ 등을 의미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정의 개념을 정리해 봄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의’와 어떻게 상통하고 어떻게 구별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하느님과 정의

1.1. 정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 : 성경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명료한 답을 제시한다. “사람아 …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예레미야서 역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자애와 공정,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나는 과연 자애를 실천하고 공정과 정의를 세상에 실천하는 주님으로 이런 일들을 기꺼워한다”(9,22-23).

이러한 요구는 하느님 자체가 곧 정의이시기에 가능한 일인데, 이를 잘 보여주는 본문은 시편 146,6-8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시고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주시며 꺾인 이들을 일으켜 세우신다”(탈출 3,7-10도 참조).

이렇게 그분은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시편 113,7)이시고, ‘가련한 이에게 정의를 베푸시고 불쌍한 이에게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분’(시편 140,13)이시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의 행위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그분은 자신의 사명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루카 4,18) 것으로 요약하시기 때문이다.

1.2. 정의, 하느님 나라의 특성 : 이러한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 통치의 특성이며,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제1속성은 정의이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곧 하느님 나라는 먹고 즐길 수 있어서 좋은 장소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로 인해 기쁨이 넘치는 장소라는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하느님 나라임은 산상설교에서도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성경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평가되는 솔로몬의 성공은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1열왕 10,9). 이는 공정과 정의가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통치자들은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이 능력을 받아 관리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곧 사회를 조화롭게 건설하는 주체는 통치자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것이다(로마 10,3 참조).


2.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제 질문은 그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로 수렴된다. 마태오 복음은 진정한 정의 구현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구축되는 것임을 선언한다. 곧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의롭다고 생각한 어떤 판단을 주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또한 주님의 기도에도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뜻을 이룸으로써 건설되는 것임이 천명되어 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예수님의 의로움 역시 아버지의 구원적 의지(뜻)를 완전히 실현하셨기에 완성된 것이었다(마태 3,15 참조).

2.1. 정의, 공동체를 위한 덕 : 성경이 제시하는 정의는, 한 인간을 더 완벽한 인격으로 성숙시키는 데 필요한 개인적 덕이라기보다, ‘공동체와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더욱 우선적 의미를 드러낸다. 곧 공동체에의 성실함이 정의의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맥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은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창세 38장)이다.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시아버지와 동침한 타마르의 행위는 그다지 바른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성경은 그럼에도 그녀를 유다보다 “더 옳다!”(26절)고 천명한다. 이는 성경이 정의를, 한 여인의 윤리적 행실로서의 차원보다 한 가문의 흥망이라는 공동체적 전망에서 이해하였음을 드러낸다. 물론 타마르의 예는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고, 성경 본문들은 공동체의 친교와 평화를 위해 요구되는 정의를 사법적, 경제적, 경신례적 차원에서 아래와 같이 촉구한다.

2.2. 정의, 사법적 차원 : 정의 구현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사법적 차원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야기된 사회적 무질서를 바로잡고 어떤 개인(또는 그룹)에 의해 파괴된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능을 사법적 정의 구현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내었다”(아모 5,10-12). “그들은 악한 행실도 서슴지 않으니 고아들이 승소할 수 있도록 그 송사를 공정으로 다루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재판을 올바로 진행하지 않는다”(예레 5,28).

그러나 하느님은 의로운 심판관(창세 18,25; 2마카 9,18; 시편 9,9 등)이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법적 정의는 “공정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한쪽을 편들어서도 안 되며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 뇌물은 지혜로운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이들의 송사를 뒤엎어버리기 때문이다”(신명 16,18-19).

2.3. 정의, 경제적 차원 :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 구현은 모두가 생존을 위한 기본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장 불확실한 조건 속에 있는 이들의 경제적 생존을 다음과 같이 보장한다. “너희는 …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야 한다”(신명 24,14-15).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두어야 한다”(레위 19,9-10).

공동체의 누구도 먹을 것이 없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경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인 것이다.

또한 성경은 경제적 정의가 ‘정확성’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분명히 한다. “너희는 재판을 할 때나 물건을 재고 달게 될 때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바른 저울과 바른 추, 바른 에파와 바른 힌을 써야 한다”(레위 19,36). “너희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저울추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 정확하고 올바른 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신명 25,13-15).

마태 20,1-16은 경제적 차원에서의 정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매우 잘 보여준다. 얼핏 읽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불공정한 거래가 소개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1절)부터 일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오후 다섯 시부터 일했으나(6절),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이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잘 읽어보면 놀라운 내용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 그렇게 기다려야 했던 이라면’(7절 참조)이라는 단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곧 다섯 시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해 불안해하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으로부터 오는 기회를 박탈당해 일거리를 찾지 못한 것이니, 노동의 부재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같은 삯을 주셨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노동의 시간으로 셈해 주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던 고통의 순간들도 엄연히 노동의 시간이었음이 선포되는 것이다.

2.4. 정의, 종교적 차원 : 성경은 종교적 자리마저도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리가 되지 못함을 비판한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이사 1,11-17; 아모 5,21-24 참조).

문서 예언자 시대의 화려한 전례는 기득권자들의 이기주의와 위선을 감추는 호사스러운 퍼포먼스였고, 진심 없는 신앙을 은폐하는 가면이며 허례였다. 성경은 하느님의 율법이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려고 제정된 것이지, 위선적 신앙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아님을 강조한다. 여러 율법 조항들이 제시한 이스라엘의 전례는, 껍데기뿐인 예배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이어야 하고, 공동체적 상생이라는 결과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5. 정의, 하느님을 믿는 것 : 성조이야기는 사실 불가능성과 모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역시 예외가 아닌데, 연로한 아브라함과 평생을 불임에 시달려온 사라에게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만큼의 자녀 수를 약속하는 것은 이미 모순의 극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극도의 모순과 역설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적 장치가 되는데, 모순되고 믿기 어려운 약속을 제안하는 하느님을, 결국에는 땅과 자녀를 그의 살아생전에는 허락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그럼에도 믿은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부각시킨다(창세 15,6).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근거가 됨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3,28; 4,22-23; 갈라 2,16; 3,6).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정의 구현의 내적 차원이다. 곧 성경의 ‘의로운 이’는 하느님의 통치와 그분의 구원의지를 끝까지 ‘믿는 이’를 말하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정의(의로움)를 당신과의 관계성에서 보여준 신뢰와 동일시하여 인정해 주신다.


정의의 주체는 하느님

이스라엘의 소명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였다. 정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분의 행위이며 그분 통치의 근간이 되므로, 무죄한 이가 의인으로 선언될 수 있도록 사법적 질서가 세워져야 하고, 모든 이가 생존을 위협받지 않도록 정직하고 정확한 경제적 기구가 활용되어야 하며, 그 질서 안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종교적 기반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 통치자들을 통해 이러한 당신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시는데, 이는 정의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정의는 자신들의 허위와 이기심을 교묘히 포장하는 부당한 ‘의식(儀式)’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부패한 삶에서 돌아서는 ‘의식(意識)’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뜻을 따라 그분과 함께 걸으며 철저하게 그분의 은총과 사랑에 의지해서 이룩해 나가야 하는 공동체적 삶이 곧 성경이 기록하고 전달한 정의로운 삶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정의 구현으로 획득된 해방과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속함으로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정의는 누구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 무가치한 존재로 대하지 않는 것, 외로움 속에 소외시키지 않는 것, 촌스럽고 억세게만 보여도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 하느님 때문에 내 식대로 또는 내 기분대로 타인을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

모두가 전설적인 혁명가는 될 수 없지만, 적어도 타인의 가난과 상처에 진심어린 미소 한번, 따뜻한 말 한번은 건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들을 위로하는 행위 같지만 사실은 나를 위로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의 오만함과 차가움, 권위와 독선, 편협함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위로가 바로 그러한 배려와 따뜻함 속에서 나에게도 번져오기 때문이다. 남을 살려주는 것이 곧 내가 사는 비결이라는 것, 불편한 것 같지만 너무도 분명하고 영롱한 진실이다.

* 김혜윤 베아트릭스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구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김혜윤 베아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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