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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보좌신부로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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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307

보좌신부로서 살아가기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어떤 문인이 예언했기 때문인지 요즘은 무슨 말만 나오면 뒤에 영성이 따라붙는다. 이런 연유인지 영성이란 말은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도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보좌신부로 살아가는 내게 맞는 영성은 무엇일까? 도대체 세상에 보좌신부의 영성이란 것이 있을까? 사제의 영성이라든가, 수도자의 영성이라면 모를까 보좌신부의 영성이라고 하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보좌신부로서 살아가면서 자기 위치와 역할에 맞는, 알맞은 삶의 방식과 지향이 곧 보좌신부의 영성이 될 것 같아 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편, 각 사람에 맞는 영성은 각자의 기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성이 있다. 그래서 필자 자신의 성향과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고자 나름대로 그동안 보고 들은 여러 선후배 신부들의 생각과 경험들을 참조해서 정리해 보겠다.

 

 

벙어리 삼 년, 봉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성품성사를 받은 지 이제 3년 10개월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성품성사를 받을 때는 참 꿈이 많았다.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각오도 많았다. 10년간의 신학교 교육이 나를 참 많이도 바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성품성사를 받으면서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난 복음을 전하러 천만 킬로미터를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러면 동료들은 ‘그게 가능할까?’ 하고 반문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천만 킬로미터를 움직이려면 그만한 체력과 재력, 또 열정이 있어야 하잖아. 하느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면 난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할 거야.”

 

참 욕심 많은 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를 청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려는 얄팍한 마음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사제로서 사제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박한 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욕심이 조금 줄었지만 아직도 그런 꿈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새색시가 시집가면 벙어리 삼 년, 봉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이라고 했던가! 이 말은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롭게 살아가라는 격언인 듯싶다.

 

보좌신부 생활을 시작할 즈음, 선배 신부들은 이 격언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늘 새롭게 다가오는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보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그것은 보좌신부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제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관건이자, 앞으로 어떤 소임지에서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보좌신부의 현실적 위치

 

사무적이지 않고 정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우리나라에서 보좌신부는 그 위치 면에서 참 애매한 부분이 있다.

 

성품을 받은 사제들은 보통은 사제로서의 대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많은 부분에서 풋내기 견습신부 정도로밖에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혀 비분강개하는 사람도 간혹 있으나, 차츰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함께 살아가는 본당 주임신부님은 물론이고 교우들도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보좌신부가 신자들 모임 때마다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보았자 소용없던 일이, 본당신부님이 나오셔서 한마디 하면 곧 반응이 보이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이런 것이 보좌신부와 본당신부님의 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교구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보좌신부 모임을 한다. 그 모임에서 보좌신부들은 각자 삶에서 겪었던 일들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조금씩 사제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름대로 사제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모습들이 엿보인다. 현실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벽들을 함께 나누다 보니 그것이 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해 한 해가 지나면서 자신의 한계를 좀 더 깨닫게 될 때마다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중심 생각은 ‘그렇더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존중하기

 

보좌신부로 살면서 존중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좌신부는 엄밀히 보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이다. 교회의 구조상 모든 책임은 본당신부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자칫 잘못 생각하면 보좌신부는 그저 본당신부님의 협의의 협력자(assistant) 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없기에 게을러질 수 있다. 삶이 나태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책임질 부분이 없기 때문에 소극적인 삶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 의미나 가치를 존중받을 만큼 충분한 삶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누릴 여지가 적다. 그저 본당신부에게 예속된 존재로 자기를 비하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좌신부는 견습신부가 아니다. 물론 사제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으로서 사제생활의 실제를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나름대로 자기가 추구하는 사제상(像)대로 자신을 형성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제로 불림을 받은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인간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존중해 주지 않아도, 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보좌신부는 스스로 존중해 가며 사제로서의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따른 현실적인 노력이 기도와 공부일 것이다.

 

 

사제들 존중하기

 

보좌신부는 본당신부님과 선배 신부님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당신부님이나 선배 신부님들을 보면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저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훌륭하거나 존경할 만한 선배님을 보면, ‘나는 과연 저 나이 때에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또는 좀 못마땅한 선배님을 보면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겠는 걸.’ 하며 속말을 해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일차적인 책임이야 자신에게 있겠지만, 사제로서의 삶이 저 사람을 저렇게 몰아갔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면, 내가 싫어하는 그 신부님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실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는 내 기준이 아니라 그분이 사제라는 것 자체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히 직무적으로 관련이 있는 본당신부와 보좌신부의 관계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좌신부가 본당신부를 존경하든 않든(그래서 ‘Ego pater, Tu pater!’-나도 신부, 너도 신부!-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결국은 한 사제단의 일원이다. 물론 일부 본당신부님들은 막돼먹은(?) 보좌신부들에게 상처(?)를 입으셔서 너는 네 방식대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본당 전체로 보면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실은 보좌신부로 살면서 나 자신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 그래서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

 

요한 성인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문제는 사실 당사자들의 문제인 만큼, 보좌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함께 사는 본당신부님과 선배 사제들을 먼저 존중하는 일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아니고 아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의 분수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느님 백성 존중하기

 

보좌신부는 신자들을 깊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존중한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를 내포한다. 교회 공동체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사회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만나는 교우들이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눈에 어떻게 비치든, 그분들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한다. 사제인 우리 자신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모두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기에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일선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교우들은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여러 가지 일로, 여러 번 교우들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교회 속담에 ‘사제에게는 신자들이 적이다.’라는 말까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인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보좌신부는 재임 기간이 짧다(청주교구는 보좌신부 임기가 1년이다). 임기가 짧다는 것은 어떤 일에서든 핑곗거리가 된다. 또 실제로 많은 경우에 교우들이나 본당신부님들도 보좌신부는 그냥 일 년 뒤에 가는 사람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보좌신부들의 마음을 나태하게 할 소지가 다분하다. 어차피 일 년밖에 안 살 텐데 하는 생각에 무슨 일에서든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는 보좌신부들에게 “보좌신부, 어차피 일 년 있다가 갈 건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본당신부님의 말씀은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 자신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해 보면 일 년만 있다 가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나에게도 교회에도 본당 공동체 어디에도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보좌신부는 일 년을 산다는 전제 아래에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며 교우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게 된 것은 주일학교 어린이들 때문이다. 본당에서 주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대하는 사제는 보좌신부이다. 나에게는 해마다 바뀌는 새로운 아이들이지만 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보좌신부는 비록 어린 시절일지언정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 어린이들에게 사제로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교회의 격언처럼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이 보좌신부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 존중하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좌신부는 교회를 존중해야 한다. 교회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이전에 교회는 교회 자체를 먼저 정화해야 한다고 양심 있는 사람들과 양식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충고한다. 또 혈기 넘치는 젊은 보좌신부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참 굼뜨고 지나치게 신중해서 늘 시대에 뒤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가 전문화되고 세분화되고 있다. 그 결과로 교회가 지금은 세상의 어느 조직체보다도 비능률적인 조직처럼 보일 수 있다. 능률과 생산성만을 앞세우는 현실에서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은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삶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살아있고, 또 앞으로의 세대를 통해서도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좌신부는 교회의 전통과 교회의 삶의 방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세상은 편리한 것을, 합리적인 것을, 능률적인 것을 우선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화되고, 조직화되고,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는다. 그런데 교회마저 판단의 기준을 그러한 발전지상주의에 둔다면 우리도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그래서 보좌신부들은 교회가 살아온 방식과,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예의 주시하면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교회의 역사가 된다고 보면,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 교회의 일꾼인 보좌신부는 교회의 삶의 방식을 충분히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하기에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다만 알고 있는 대로 살지 못할 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 우리가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나중에는 사는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느낀다.

 

보좌신부의 영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나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한 부분이 많았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제로서 살 수 있도록 힘과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과 선후배 사제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사목, 2004년 11월호, 김태원(청주교구 내덕2동본당 보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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