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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회고와 전망: 이명박 정부 5년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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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1029

[경향 돋보기 - 회고와 전망] 이명박 정부 5년이 남긴 것


이 글이 출판되는 시점에는,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당선자는 다음 5년에 대한 준비로 바쁠 테고, 유권자들은 그의 당선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기대와 걱정을 나눌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구이든, 유권자인 우리가 취임하는 새 대통령에게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1차적으로 그가 선거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내놓은 약속들이 기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공약과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백 개에 이르는 정책약속들 가운데,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야 할까?

또, 대통령 선거는 그 속성상 두 명의 유력후보 간 경쟁의 성격을 띤다. 각 유력후보들은 정치, 경제, 사회, 복지, 문화, 교육 등 모든 정책분야를 망라한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두 명의 유력후보를 놓고 4천만 유권자가 선택을 했던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정책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인 동의를 얻었다고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지난 이명박 정부 5년의 경험을 통해 대통령이 유권자의 민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등장한 대통령 가운데 2위 후보와 가장 큰 득표차로 당선이 되었다. 이런 압도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강한 정책추진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선거에서의 압도적 지지와 대통령으로서 정책추진에 대한 지지는 같지 않음을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우병 사태 : 선거 득표율과 정책 지지도는 다른 문제다

이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이른바 ‘광우병 사태’는 2008년 4월 18일,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위한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안 협상이 타결되면서 시작되었다. 4월 29일 MBC의 ‘PD수첩’ 프로그램이 “긴급 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방송했고,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시작되어 이후 100여 일 동안 지속되었다.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의 입장에서, 임기 개시 직후 벌어진 이러한 대규모 저항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선거운동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는 쇠고기 수입조건 재협상을 말하진 않았지만 ‘한-미 FTA’ 비준을 적극 지지했고 당선되었다. 당시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입장에서 쇠고기 재협상은 한-미 FTA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 위한 조치로 인식되었고, 당연히 대중적 저항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저항의 원인을 특정언론의 왜곡보도와 좌파세력의 정치공격 탓으로 돌렸다.

특히 정부는 광우병에 대한 ‘언론과 좌파세력의 왜곡된 정보’ 제공이 문제라고 인식해, 광우병 위험이 극히 미미하다는 점을 홍보하려고 애썼고,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왜곡된’ 언론보도를 통제하려고 했다. 결국 광우병 보도를 했던 ‘PD수첩’은 법정에 서야 했고, 보도담당자들은 이명박 정부 임기 말인 2012년 12월에 와서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당시 유권자들을 거리로 불러낸 것이 과연 ‘광우병에 대한 잘못된 정보’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한 원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새로운 정부는 새롭게 정책에 대한 설득과 승인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점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후보의 수많은 정책 가운데 몇몇에 동의하거나, 세부정책에 대해서는 모두 알지 못하지만 전반적인 국정운영 방향 정도를 인지하면서 투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유권자의 무관심이나 무지 때문은 아니다. 아무리 세련된 유권자라도 국정의 전 분야를 망라한 후보의 정책을 세세히 따져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선거가 끝나면, 세세한 정책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면서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마련해 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경부대운하’, ‘학교자율화 조치’, ‘한-미 FTA 비준’ 등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경부대운하’는 선거과정에서 이명박 후보의 핵심공약이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조차도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한 정책이었다. 대선 직후였던 2008년 1월 1일 발표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의 51%가 대운하 공약의 재검토를 원했고, 공약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은 24.4%에 불과했다(경향신문, 2008년 1월 3일자 1면).

한-미 쇠고기 재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인 2008년 4월 15일, 정부는 초 · 중 · 고교에 일제고사를 도입하고 성적을 기준으로 한 경쟁력을 확대하고자 기존 규제조치들을 풀어주는 것을 골자로 한 ‘학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물론 이 정책 역시 17대 대선 이명박 후보의 교육공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 학부모, 교사, 사회 전반에 가져올 엄청난 파장 때문에, 추진하더라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던 정책이다.

‘한-미 FTA’는 이명박 정부의 전임정부였던 노무현 정부 때부터 강한 사회적 반대의견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당시에도 찬 · 반 여론이 팽팽했다. 2008년부터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 비준을 강력히 추진했지만, 결국 2011년 11월에 가서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던 게 비준안이었다.

2008년 봄 촛불시위에 고등학생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사실이나, 환경운동단체들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점, 노무현 정부 때부터 형성된 한-미 FTA 반대활동단체들이 적극 결합했던 점은, 단순히 광우병에 대한 유권자의 무지나 좌파세력의 정보왜곡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쇠고기 재협상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정책에서도, ‘공약했고 당선되었으니 유권자들이 반대를 하든 말든 나는 추진한다.’는 식의 태도가, 유권자의 분노와 저항을 일으킨 측면이 크다.

하지만 2008년 봄 사태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시작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정부는 이 사태로 정부에 부정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언론에 강한 불신을 갖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매체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이런 인식이 불러온 것이, 이른바 ‘미디어법’ 파동과 언론3사 파업사태였다. 정부는 집권당을 통해 직권상정과 날치기, 국회법조차 무시한 채 미디어 관련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했고, 공영방송 장악을 시도했다. KBS, MBC, YTN의 파업이나 이후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정부와 유권자들 사이에 설득과 소통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정부에게 필요했던 것은, 선거공약과 실제로 추진될 정책을 구분하고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동의를 새롭게 구하려는 적극적 노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미디어를 불신하고 정부 관리 아래 두려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더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찬 · 반 논쟁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지지기반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로를 채택했다.


경부대운하 - 4대강 사업 : 공약했어도 때로 타협하고 포기해야 한다

2008년 5월경, 이명박 정부는 ‘경부대운하’에 대한 반대여론에 밀려 이를 백지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서 ‘경부대운하’라는 정책명칭은 사라졌지만, 곧 이 사업은 ‘4대강’사업으로 등장해 2009년 예산안에 반영되었고 관련 법안 개정작업으로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2009-2012년 예산안이 모두 여당 단독으로 처리되게 만든 핵심요인이었다. 4대강 예산의 삭감을 요구한 야당과 강행을 추진한 여당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당이나 관련 시민단체들은 ‘4대강’사업이 ‘경부대운하’사업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고, 철회를 요구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4대강’사업에 대한 반대의견은 찬성의견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경향신문, 2010년 6월 29일자 40면), 지방선거가 끝난 뒤 당선된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에서는 차례로 ‘4대강’사업의 철회나 축소를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경부대운하’와 ‘4대강’사업은 다른 사업이라고 강변하며, 임기 끝까지 이를 추진했다.

돌이켜 보면, 17대 대선 선거운동기간부터 지금까지 ‘경부대운하’ 또는 ‘4대강’사업이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시기는 없었다. 그럼에도 왜 대통령과 정부는 이를 끝까지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자신의 제1순위 공약이, 왜 선거운동기간에조차도 다수 유권자의 반대에 직면해야 했는지 의아했을지 모른다. 이른바 ‘747공약’을 지지해 주었던 그 유권자들이, ‘747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정책수단으로 제시했던 ‘경부대운하’를 거부하는, 이 ‘역설적’ 상황이 변덕스러운 여론 탓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걸 이명박 정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거 때 여론이 5년을 가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사회다. 하물며 이 정책은 선거운동기간에조차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문화일보, 2007년 11월 1일자 6면). 더 풍부하고 많은 정보가 제공되고, 찬 · 반을 가르는 다양한 공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론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정책의 내용을 알아가고 공론화하면서 구체적인 의견을 가지게 될 때 그리고 그 의견이 오랜 기간 지속될 때, 이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여론이 아니라 정책결정자의 태도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끝까지 이를 바꾸지 않았다.


‘부자’ 감세정책 : 정책은 거짓말을 한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분명 ‘감세’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감세를 통해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킴으로써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0% 정도는 이 후보의 감세정책을 지지했고 또 50% 정도는 지지하지 않았다(문화일보, 2007년 11월 1일자 6면). 하지만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감세정책이 부자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라고 말하지 않았고, 아마도 그를 지지했던 다수 유권자들 역시 그의 감세정책을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 후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 방향은 분명했다. 2008년 12월 12일, 한나라당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날치기’를 단행했는데, 당시 대상이 된 주요 법안들이 종합부동산세법, 소득세법, 상속세 및 증여세법, 법인세법 개정안이었다. 모두 재산이나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법안들이다. 반면 이 감세에서 발생한 부족한 세수는 나중에, 부가가치세나 유류세처럼 재산이나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모두 ‘골고루’ 내야 하는 세금을 올려서 충당했다.

<그림 1> 노무현-이명박 정부 계층별 세금 증가율
출처 : 오마이뉴스, “서민 위한 감세정책? 이 한 장의 도표를 보라”(2012.12.11.)


그리고 5년이 지난 뒤, 그 결과는 <그림 1>과 같아졌다. 지난 5년 동안 소득 하위 20-40% 계층은 65.7%의 세금을 더 내게 되었지만, 상위 20%는 13.2%만 더 부담하면 되었다. 대통령은 선거운동기간 ‘감세정책’을 말했음에도 당선되었으니 당선 후 추진은 정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정책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다수도, 당시에는 그 감세정책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때로 정책은 거짓말을 한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 스스로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은 어떤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거짓된 정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가 아니라 국민들이 지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정책의 디테일에 들어있는 거짓 또는 참까지 읽어내는 혜안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이자 엄마이고 아빠인 유권자들이 그런 혜안까지 가져야 한다는 건, 참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정치에는 경쟁이 중요하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거짓을 폭로하고 자신의 참을 증명하도록 만듦으로써, 유권자는 정책의 거짓말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서로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이 담합해서 참을 말하지 않을 때, 이를 견제해 줄 자유로운 언론이 중요하다. 모든 언론이 참을 말하지는 않지만, ‘참을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언론’을 살리기 위해서 언론은 자유로워야 한다.

이명박 정부 5년은 이런 정치의 기본요소가 지켜지지 않을 때, 정치공동체 모두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걸 경험으로 보여주었다.

* 서복경 데레사 - 한국선거와 정당정치를 연구하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으로 근무했고, 2009년부터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1월호, 서복경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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