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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진정한 민주화: 조화로운 민주화를 향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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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2 ㅣ No.1034

[경향 돋보기 - 대선 이후의 진정한 민주화] 조화로운 민주화를 향한 단상


서(序) : 조화와 균형을 찾을 때

“다양한 악기가 내는 제각각의 소리가 합해져 멋진 교향곡이 나오듯이 각양각색의 입장과 목소리가 합해져 조화로운 미국 민주주의가 나온다.” 달(Robert Dahl)이 미국 민주주의를 예찬하며 한 말이다. 그러나 샷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는 “미국 민주주의를 교향곡에 비유하자면 상류계급의 악센트가 잔뜩 들어있는 교향곡이다.”라고 비꼬았다. 샷슈나이더는 미국에서 꽃핀 다원적 민주주의가 가진 자 쪽으로 편향되며, 조화와 균형을 잃기 쉽다고 경고한 것이다.

달과 샷슈나이더의 논쟁은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후 민주주의 담론은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참여 민주주의, 숙의(심의) 민주주의, 협의체 민주주의, 전자 민주주의, 초국적 민주주의, 성찰적 민주주의 등 새로운 시대환경을 반영한 개념들이 등장하며 민주주의의 차원을 늘렸다. 단순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균형뿐 아니라 다수 대 소수, 참여 대 위임, 소통 대 세력, 주장 대 성찰, 오프라인 대 온라인, 내부 대 외부 등 다양한 대비구도에서의 민주적 균형을 논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민주화를 이루기가 더 힘들어진 것이다.

서구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닌 한국 민주화가 당장 완전한 조화로움을 갖추어야 한다고 요구하긴 무리다. 단기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뤘으니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럼에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사반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한국 민주화의 긍정과 부정의 측면들을 되돌아보며,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한 치유 방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기대와 걱정이 혼재하는 가운데 새 정부가 경제, 복지, 교육, 안보 등 현안뿐 아니라 체제 전반의 민주화에서도 성공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명(明) : 절차적 민주주의 정립

프리덤 하우스(전 세계의 민주화와 자유 수호,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의 보수 성향 민간단체)가 해마다 발표하는 각국의 민주화 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1988년부터 자유국가로 올라섰고 2004년부터는 국민의 정치적 권리에서도 1등급 국가 반열에 합류했다. 적어도 절차적 의미의 민주화가 최고 수준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과거 독재시절과 달리 오늘날 국민은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고 결사의 자유도 기본적으로 존중되고 있다. 언론은 별 제약 없이 권력 감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투명성도 전에 비해선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국회는 더 이상 행정부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만은 않는다.

무엇보다 선거과정의 민주화가 돋보인다. 선거가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관리되고, 투개표 부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부 극단세력을 제외하고는 동의할 것이다. 선거경쟁도 치열하다. 집권당이나 현역의원이 불공평하게 선거 프리미엄을 누린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국민의 권력견제 심리에 의해 불리해지는 경우가 많다. 약자 측에 동정표가 쏠리는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 때문에 여소야대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도 1997년, 2007년 두 번 있었다. 린츠(Juan Linz)는 적어도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있어야 민주주의로 진입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이 기준을 충족시킨 것이다.

1987년 이래 성취한 한국 민주화는 분명히 세계가 주목할 만하다. 과거 독재체제에 저항하며 고초를 겪은 많은 사람과 오랫동안 묵묵히 감내한 국민이 만들어준 역사적 호조건을 기반 삼아 짧은 기간에 압축적 민주화를 이룬 우리나라는 모범사례로 꼽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우리 국민의 기대수준이 워낙 높아 스스로의 민주화에 대한 만족감이 큰 편이 아니지만, 비교학적으로 볼 때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사회전반에 걸쳐 민주화가 지나쳐 방종으로 흐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암(暗) : 집단주의의 지배, 숙의 민주주의의 실종

한국 민주화의 진전은 축하할 일이지만 급하면 체하기 쉽다. 압축적 경제성장에 여러 허점이 따르듯이 압축적 민주화에도 구멍이 생기기 쉽다. 한국에서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이면에는 여러 어두운 모습이 상존하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집단주의적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유권자는 특정 정당을 중심으로 뭉쳐 정치적 정체성을 느끼고, 정당들은 지지기반이 되어주는 유권자 계층을 위해 국정운영상 매개체 역할을 하며 국정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대중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정당이 대중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것이다. 그만큼 정당의 민주적 순기능이 중요하다. 정당이 없었다면 대중 민주주의가 보편적으로 대세가 되어 확산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과도한 지배력을 발휘할 경우에 문제가 심각해진다. 개인적 자율성과 합리성은 사라지고 집단주의적 패거리 문화가 이성을 억누르게 된다. 당론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경우에 따라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은 언론의 각광을 받지만 당내 입지가 좁아져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지고, 공천 시 불이익을 받거나 심한 경우 출당(黜黨)까지 당한다.

한국정치에서 중간적 조정과 합의, 부분적 문제해결이 힘들고 걸핏하면 전체적 교착상태가 생기는 근본적 이유는 정당이라는 거대한 집단 대 집단의 대결구도가 과하다는 데에 있다. 강한 기율(紀律)속에 전개되는 정당 간 전면전은 국지적 갈등에 비해 민주적 방식으로 조정하거나 해결하기 힘들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정당 집단주의에 지역주의라는 감정적 요인이 합해지면 최악의 조합이 된다. 합리적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경직된 집단주의가 팽배할 경우 이성적 설득과 독자적 판단이 어려워지며, 따라서 소통, 숙의를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은 불가능해진다. 남을 설득하려다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킬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아예 설득을 위한 숙의를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다. 그 대신 자기 입장을 무조건 크게 외쳐대고 같은 입장인 사람들의 세(勢)를 불림으로써 유리한 협상위치를 차지하려 한다.

그 결과는 과도한 세(勢) 과시, 충돌, 교착의 악순환이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단순한 수(數)에 불과한 피동적 존재가 아니고, 각자 독립성을 갖고 상호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때론 생각을 바꿔 조정, 합의하는 적극적 존재이다. 그러나 맹목적 집단주의에 빠져있는 우리 현실에선 이렇게 숙의하는 적극적 민주시민 상(像)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추(醜) : 포퓰리즘의 선동, 이념 대결의 격화

집단주의적 대결과 교착이 이어지고 그 타개책으로서의 소통이 실종됨에 따라,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각종 추한 편법과 치졸한 전술에 의존해 왔다. 그들은 대치와 교착 정국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려고, 정규 제도경로를 벗어나 자기편을 들어줄 만한 계층에 직접 호소하고 여론을 움직여 주도권을 쥐려는 장외 투쟁을 벌이곤 한다.

여야 공히 이런 모습을 보인다. 약자이고 소수인 야당이 제도경로를 피해 장외로 나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강자라 할 수 있는 다수파 여당도 제도 틀 안에서 정책의제를 추진하는 난제에 매달리기보다는, 차라리 대중에 직접 호소함으로써 상대방을 압박하는 전술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과도한 집단주의 구도 속에서 민주적 대화를 통한 조정과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야가 모두 제도경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직접적 대중 호소는 필연적으로 장밋빛 포퓰리즘(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행태) 선동으로 이어져 왔다. 이럴 경우 각종 무리한 정책으로 국정 난맥이 초래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화가 훼손되어 장기적으로 민주적 거버넌스(거버먼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해 당사자 간의 특별한 형태의 상호작용)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의 기대가 비현실적으로 상승해 결국엔 기대와 현실 간의 괴리로,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갖게 된다.

더욱 심각하게, 포퓰리즘 선동은 국민 전체를 이념 대결의 포로로 전락시킨다. 정치인들은 대중 지지의 세(勢), 강도, 지속성을 늘리려고 이념으로 무장하고, 권력경쟁을 벌이는 상대 당과 차별성을 보이고자 반대 쪽 이념으로 더욱 멀리 이동하는 이념적 양극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정치인과 정당이 이념을 권력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국민 중 상당수가 잘못 영향 받아 진보든 보수든 경직된 이념에 치중해 있다.

국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이념성을 띠게 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권력욕에 물든 정치인들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이념 대결의 포로가 된다면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개탄스러운 일이다.


병(病) : 성급한 성과주의, 편협한 절대주의

그렇다면 왜 한국 민주주의는 여러 암(暗)과 추(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수많은 제도개혁이 있었지만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선진 민주국가들의 정치제도를 이것저것 도입해 봤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나기 일쑤였다. 제도의 결함이 근본 원인일 것 같지는 않다.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에 큰 하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미국 헌법제도는 대단히 모호하고 내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정 효율성을 낮추는 교착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미국 민주주의는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 현행 우리나라 헌법을 내각제나 이원집정제로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고칠 경우 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제도보다는 근원적인 우리의 의식, 정치문화, 사회 분위기가 성급한 성과주의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여건에서의 생존경쟁 때문인지, 일류가 되고자 하는 의욕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나라 정치와 국정운영은 성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려있다. 성급한 성과주의는 무언가를 꼭 이뤄내야 한다는 집착을 낳아 과정의 미를 무시한 채 집단의 힘을 빌리고 소통, 숙의를 생략하고 선동적 수사를 남발하게 만든다. 빠른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을지 몰라도 여러 측면이 조화를 이룬 성숙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매우 곤란한 병이라 하겠다.

성급한 성과주의뿐만이 아니라 편협한 절대주의적 신념도 한국 민주화를 방해하는 고질병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절대선이란 생각 아래 절대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 정치인들의 절대주의적 편견과 아집은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에게도 전염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소통과 숙의, 조정과 타협이 잘 이루어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약(藥) : 제도경로를 중시하는 점진주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한국 민주주의는 절차적 차원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국민-정치인 관계는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실질적 의미에서는 여러 어둡고 추한 문제점이 발생되며, 정치인 간 관계와 국민 간 관계는 성숙한 민주화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정치인 간 관계는 정당 집단주의로 민주성을 잃고 대화 부재를 겪고 있다. 정치인 간 게임 규칙마저 찾기 힘들다. 국민 간 관계는 정치권에 의해 부정적 영향을 받아 지역 집단주의에 멍들고 이념적 양극화 틀에 갇혀있다. 민주시민으로서의 활발한 상호작용과 긴밀한 상호연계를 보기 힘들다. 건전한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기 힘든 현실이다. 사실, 국민-정치인 관계도 일방적 이념으로 포장된 포퓰리즘 선동 탓에 건전한 민주성을 띠고 있지 못하다.

이런 문제의 근원에는 성과주의적 집착과 절대주의적 아집이 있다. 이제 집착과 아집을 줄이는 약을 찾아야 한다. 정치의식과 정치문화를 바꾸는 처방이 쉬울 리 없지만 제도화를 중시하는 점진주의가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작동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제도경로를 존중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제도경로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빨리 쉽게 낼 수 없고 지난한 소통과 조정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을 뿐이다. 때론 조급한 마음에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상충되는 생각이 맞부딪치며 조금씩 접점을 찾아가는 인내심을 요하는 과정인 것이다. 민주적 제도경로에서의 점진적 변화를 대명제로 존중하도록 국민 캠페인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의식 변화에 대한 촉구가 필요하다.


결(結) : 조화와 균형의 교향곡

민주주의는 수많은 측면을 지닌 복합체다.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되도록 여러 측면에서 고루 민주성을 높일 때 그 체제는 조화로운 민주화를 이뤘다고 칭송받을 수 있다. 한국 민주화는 일부 밝은 측면을 갖고 있지만 아직 어둡고 추한 측면도 많다. 좋지 않은 측면만 부각시키며 비관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냉철한 반성을 통해 절차적 의미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에서 성숙한 민주화를 추구해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관악기 위주의 강렬한 음악처럼 격정적이지 않다. 전자기타 위주의 음악처럼 자극적이거나 즉흥적이지도 않다. 모든 악기가 악보에 따라 고루 나와 각자의 역할을 하며 전체적으로 절묘한 배합을 이루는 부드러운 교향곡이 곧 조화와 균형의 민주주의라 하겠다.

* 임성호 -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서, 교무처장, 인류사회재건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임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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