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교회문헌ㅣ메시지

2006년 사제 성화의 날 묵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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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6-16 ㅣ No.240

교황청 성직자성에서는 2006년 사제 성화의 날 주제를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로 알리며,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2006년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하신 강론을 올해 사제 성화의 날(예수성심대축일, 2006년 6월 23일) 묵상 자료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강론

성 베드로 대성전

(2006. 4. 13.)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과 사제 여러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목요일은 주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빵과 포도주로 당신 몸과 피의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임무를 주신 날입니다. 이로써 그분 몸과 피의 봉헌 곧 그분 자신의 봉헌이 구약의 파스카 양과 다른 모든 희생 제물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이 은총으로 충만하여 그분의 것이 된다는 사실, 곧 피조물이 창조주께 돌아간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사제직 또한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사제직은 더 이상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주시는 분, 우리를 당신께 끌어당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제직의 신비는 하찮은 인간인 우리가 성사의 힘으로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과 더불어 “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자 하십니다. 성목요일에 우리는 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를 새롭게 감동시키는 이 감동의 신비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합니다.

 

위대하고 신비로운 것이 일상에 무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특별한 기념이 필요하며, 그분께서 당신 손을 우리에게 얹어 주시고 우리를 이 신비에 동참시켜 주신 그 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성사를 받은 표징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중심에는 안수라는 매우 오랜 예식이 있습니다. 안수로 그분께서는 나를 차지하시고 “너는 내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손의 보호 아래 있다. 너는 내 가슴의 보호 아래 있다. 너는 내 손바닥 안에서 안전하며, 바로 이렇게 하여 나의 큰 사랑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손 안에 머물러라. 그리고 네 손을 나에게 다오.”

 

그러면 손의 도유를 기억해 봅시다. 이 도유는 성령과 그분의 권능의 표징입니다. 왜 하필 손이겠습니까? 인간의 손은 행위의 도구이며, 세상을 “돌보기 위하여” 세상을 직면할 수 있는 역량의 상징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우리에게 얹으셨으며, 이제 우리의 손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손으로 쓰고자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손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물건이나 사람이나 세상을 돌보는 도구로서 우리의 소유로만 그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그보다는 우리 자신을 당신 사랑의 도구로 삼으심으로써 우리의 손이 당신의 거룩한 손길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이 봉사의 도구가 되고,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증하고 전달하는 한 개인 전체가 지닌 사명의 표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손이 인간의 기능, 그리고 일반적으로 세상을 처리하는 능력으로서의 기술을 상징한다면, 도유 받은 손은 내어주는 역량, 사랑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창조력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구약에서 도유는 봉사에 몸담게 되는 표징입니다. 왕과 예언자와 사제는 자기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줍니다. 확실히 그는 자기보다 위대하신 분께 자신을 내어드림으로써 봉사할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 곧 그리스도로 드러내신다면, 이 자체가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사명을 위하여 성령과 일치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왕직과 새로운 사제직을 주시고,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 창조의 목적이신 그 한 분을 위하여 사는 예언자가 되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손을 그분께 맡기고, 우리 손을 몇 번이라도 다시 잡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교의 안수라는 성사적 몸짓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손을 얹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성사적 표징은 삶의 여정 전체를 요약합니다.

 

첫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만나 뵙고 “나를 따르라!” 하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어쩌면 다소 주저하면서, 뒤돌아보고 이것이 정말 우리의 길일까 망설이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다가 어디쯤에선가 우리는 고기잡이 기적 이후 베드로가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막대한 임무와 초라한 우리 자신의 부족함에 겁먹고 돌아서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그러나 주님께서는 친절히도 우리 손을 잡으시고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나를 떠나지 마라!”

 

그리고 몇 번 더,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 다가가다가 갑자기 물이 자신을 받쳐주지 않고 몸이 가라앉는 것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보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지난 천년기, 지난 세기의 포효하는 파도를 헤쳐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 그분은 우리 손을 잡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부력’을 주셨습니다. 곧 믿음에서 비롯되어 우리를 위로 떠오르게 하는 가벼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손을 뻗어 우리를 잡아 주시고 끌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축해주십니다. 우리의 눈길을 언제나 주님께 고정시키고 주님께 손을 내밉시다. 그분의 손이 우리 손을 잡게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가라앉지 않고, 죽음보다 강한 생명과 미움보다 강한 사랑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고,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 가운데 하나가 영성체 전 기도에서 하는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청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몸, 그리스도 자신과 이루는 친교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도록, 성찬의 신비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청합시다. 그분께서 결코 우리 손을 놓치지 않으시도록 청합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우리에게 얹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 이 말씀은 사제직 제정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심지어 당신 자신까지도 맡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당신 자신으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신뢰입니까! 그분께서는 참으로 당신을 우리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사제 서품의 본질적인 표징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그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안수, 우리에게 맡기신 말씀인 복음서의 수여,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심오하고 인격적인 신비를 전달해 주신 성작의 수여가 그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이 모든 것의 일부입니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죄의 비극과 세상의 모든 어둠에 대한 그분의 인식에 동참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열쇠를 우리 손에 지니게 됩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제가 된다는 것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우정을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투신하여야 합니다.

 

우정은 같은 생각과 같은 의지를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말하듯이(2,2-5 참조) 우리는 예수님과 나누는 이러한 생각의 친교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친교는 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 행동을 함께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 곁에 머물러 점점 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성경을 읽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통하여 그분께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현존하신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활동을 그분 앞에서 또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숙고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서 시작되어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사가들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자주 ‘산으로’ 올라가시어 밤을 새워 홀로 기도하셨다고 전해 줍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올라야 하는 내면의 봉우리, 기도의 산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정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사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고,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 자체는 영웅적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와 이루는 깊은 내적 친교에서 비롯되지 않은 외적 행동은 결국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아무 효과도 거둘 수 없습니다. 이 내적 친교를 위하여 들이는 시간은 참으로 사목 활동을 하는 시간, 진정한 사목 활동의 시간입니다. 사제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광적인 행동주의에 빠진 세상은 흔히 그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메마른 땅을 적셔 주는 생명수가 솟아나게 하는 기도의 힘이 결핍되어 있을 때 세상의 행동과 능력은 파괴적인 것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른다.” 사제직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내면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다 해서 성사의 유효성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벗이 될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 사제가 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고 단순한 종의 무지함에서 벗어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고 고통 받고 행동하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언제나 그분 제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이며 몸이신 그리스도 전체와 친교를 이룰 때에만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교회의 활기찬 포도나무 안에서만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덕분에 성경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살아있고 실제적인 말씀이 됩니다. 모든 시대를 포괄하는 교회라는 생생한 주체가 없다면, 성경은 서로 다른 글들로 쪼개져서 과거의 책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현존’의 장소, 곧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같은 시대에 머무시는 곳, 바로 그분의 교회의 몸 안에서만 성경은 현재적인 설득력을 지닙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한 벗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 신이나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살과 피를 지니신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부활하시어 당신 안에 인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신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제직의 소명입니다. 오직 이렇게 할 때에만 사제로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터키 트라브존에서 기도하던 중 총에 맞아 숨진 로마 교구 출신의 안드레아 산토로 신부에 관한 말씀으로 이 강론을 맺을까 합니다. 피정 중에 마르코 체 추기경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산토로 신부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 가운데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제 몸을 빌려 일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 자기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악을 짊어지고 고통을 함께 함으로써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취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칩시다. 이렇게 할 때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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