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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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마재와 하느님의 종 정약종(丁若鐘)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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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799

마재와 ‘하느님의 종’ 정약종(丁若鐘) 순교자

 

 

성지(聖地)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팔레스티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 우리나라에도 성역, 성지(聖址), 사적지가 여럿 있다. 순교자,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거나 그분들의 유적지를 방문해 경배 드리는 일은 하나의 신심행위이기도 하며, 그분들의 행적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 분명하다.

 

의정부교구에는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의 무덤(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가족묘소)과 명주에 깨알같이 작은 붓글씨로 조선교회의 박해 상황을 적어나간 ‘백서’의 집필자이자 신유박해 순교자인 황사영의 묘소(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가 있는가하면, 교회 창설의 요람이라고 할 마재[馬峴]성지가 있어 찾는 이들의 옷깃을 새삼 여미게 한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현, 약전, 약종 형제들의 생가 터로 이름난 이곳 마재는 우선 그 생김새부터가 특이하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북한강과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서로 만나는 양수리(兩水里)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으로 마을 입구가 나타난다.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 마치 한강수를 지키는 파수꾼 같다고 표현하는 이도 있다.

 

마재의 다산 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무덤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수원교구 지역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바른편은 약종이 살았으며 그의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바다처럼 넓어졌으나 2백 년 전의 능내리(마재)와 배알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이웃 마을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부터 몇 차례에 나눠 이야기하고자하는 정약종(丁若鐘) 순교자는 현재 한국 주교회의가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해 교황청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절차를 밟고 있는 125분(최양업 증거자 포함)의 ‘하느님의 종’ 가운데 한 분이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미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와 딸 정혜 엘리사벳, 그리고 아들 하상 바오로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103위 시성식 때 성인으로 선포되어 제단에 오른 바 있다. 온 가족이 목숨 바쳐 하느님을 사랑한 내력을 들어보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순교자 집안은 아버지보다 아들딸들이 먼저 복자가 되고 성인이 된 경우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큰 박해가 네 차례 있었는데, 1839년(기해)과 1845년(병오), 1866년(병인) 박해 때 순교한 이들 중에는 시성된 분이 103분이나 되지만, 1801년(신유) 이전에 순교한 이들 중에는 아직 제단에 오른 이가 없고, 정약종 집안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아들 하상은 103위 중에서도 평신도들을 대표하는 순교성인이다.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참석해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주재하면서 “…나에게 맡겨진 권한으로써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해서 성인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아버지 아우구스티노가 순교한 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였고, 하상 바오로는 이때 겨우 일곱 살이었으며, 정혜 엘리사벳은 다섯 살이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1839년 기해년에 또 한 차례의 큰 박해가 일어나자 온 가족에게 시련과 고통이 겹쳐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느 날 밤 하상의 어머니 류 체칠리아가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다.

 

“아니, 여보! 아오스딩 아니셔요?”

 

“그렇소, 나요. 그동안 고생이 오죽했겠소. 헌데, 나는 천국에서 방 여덟 개가 있는 집을 하나 지었소. 다섯은 이미 찼고 셋이 비었구려. 그러니 체칠리아, 사는 것이 곤궁하고 어렵더라도 잘 참아 받고, 승리의 팔마가지를 흔들면서 우리를 만나러 천국에 올라오도록 하시오. 부탁이오. 힘을 내어요. 승리해야 한단 말이오.”

 

이렇게 격려하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과연 맏아들 철상 카롤로가 신유년 4월 아버지를 뒤따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 것을 비롯해서 다섯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내와 아들딸, 이렇게 셋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 꿈은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는데, 이날 꿈속에서 남편이 일러준 말은 체칠리아에게 크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음이 분명했다. 체칠리아는 매를 너무 맞아 감옥에서 그만 숨지고 말았다. 103위 중 최고령인 79세였다.

 

정약종이 순교할 때(1801)가 42세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태어난 해가 1760년(영조 36년)으로 추정할 수 있고, 태어난 곳도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양근(陽根)땅 마재, 곧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이곳 마재가 한국 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것은 1784년의 한국교회 창설 이전부터인데, 나주 정(丁)씨 집안사람들이 대물림으로 내려온 한문번역 서학서(西學書)를 읽으면서 천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약종 4형제 중 둘째 약전은 같은 남인 출신 이윤하(마태오, 동정부부 이루갈다 순교자의 아버지), 이승훈(베드로), 김원성 등과 어울려 지내면서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성호 이익의 학문을 따랐다. 아우 약용도 1777년 성호의 유고를 처음 읽은 뒤 그의 학문을 따르게 됐고, 그들은 1779년 주어사 강학에서 서학서에 관한 토론을 벌임으로써, 학문적 관심을 가톨릭 신앙으로 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에는 마재를 방문한 이벽(요한)과 함께 정약전·약용 형제들이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약종이 주어사 강학에 참석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또 그가 누구로부터 학문을 배웠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성격이 곧고 총명하면서 탐구심이 강했지만, 과거를 위한 학문은 의미가 없다며 일찍이 포기했다. 그는 형제들보다 뒤늦게 27세 때인 1786년에 이르러서야 둘째 형 약전에게서 천주교에 관해서 듣고, 권일신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취한 것은 그 자신도 성인처럼 젊은 시절의 방황을 극복하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알고 따르면서 그분을 널리 전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비록 세례는 형제들보다 늦게 받았지만, 일단 믿고 나서부터는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며, 집안의 박해로 인해 마재를 떠나 한강 건너편 양근의 분원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했다. 1795년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교리를 직접 배우고 익히면서 전교활동 조직인 명도회 회장이 되어, 저 유명한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했다. 교회의 여러 책들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명백하고 알기 쉽게 쓴 이 교리서는 부녀자나 어린이들까지 펴보기만 하면 환하게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을 정도였다. 정약종의 영세 입교와 활동은 마치 사도 바오로의 개종처럼 지식인의 복음화로서 그 의미가 큰 것이었다.

 

지금 극심한 고통 중에 노환을 앓고 계시는 한 고위 성직자는 “내가 이렇게 반백년 이 넘도록 성직자로 살아오면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가장 힘들었던 것이 머리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는 여정이에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 사이가 이토록 멀 수가 있다는 설명이요, 알고 사랑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정약종 순교자는 한글로 쓴 상·하 두 권의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낼 만큼 교리에 밝은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 순교자였다.

 

“무릇 사람이 밝은 거울에 비취면 거울 속에 그 얼굴이 나타나고, 또 사람이 마음에 한 가지 것을 사랑하면 마음속에 그 사랑하는 것이 생긴다. 그와 같이 천주도 이러하시어, 무시로 그 무한히 아름다운 본체, 무한히 밝은 마음 가운데 비치어, 무한히 아름다운 얼굴을 나타내시니, 그 얼굴이 곧 당신의 얼굴이시라. 또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한히 아름다우신 정을 발하시니, 그 발하신 사랑이 또한 당신의 사랑이시니라. …그 본체는 아비라 이르고, 그 낳으신 얼굴은 아들이라 이르며, 그 아비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여 발하신 정은 성신(聖神) 곧 성령(聖靈)이라 이르니라.”

 

삼위일체 교리는 오늘날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정약종은 이것을 나름대로 깊이 이해하고, 위에 적은 대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가 있었다. 200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문화관광부는 소책자에서 정약종을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그가 말한 사랑이 더 이상 효(孝)라든가 인(仁)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사람의 정이나 사람 사이의 사랑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지만, 천주는 완전한 존재이시고 전능하심으로 그 사랑이 무궁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마음속에 무한한 보물을 지니고 있으니, 바로 거룩하신 성삼위이시다. 그리스도로 변화된 우리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성삼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영혼의 덧문’을 닫고 ‘영혼의 안쪽 문(內門)’을 열어 성삼위와 대화할 수가 있어야 한다. 이는 영원하신 분께서 사시고 참되신 분께서 현존하시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천국에 머물도록 하는 초대이다.

 

요즘 TV 드라마로 한창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조선왕조 제 22대 임금 정조가 재위 24년이던 1800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순조가 불과 열한 살에 왕위를 잇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신유(辛酉) 대박해가 일어났다. 1800년 12월 17일 최필공, 최필제가 붙잡히고, 1801년 1월 9일 총회장 최창현이 밀고자의 밀고로 체포되자 유생들이 빗발치듯 천주교배척 상소를 올렸고, 1월 10일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반포되면서 교우들이 줄줄이 붙잡혔다.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으니, 곧 정약종의 책롱(冊籠)사건이다. 교리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열심히 연구하던 그의 집에는 교회 서적과 상본, 성물, 북경 주교 등의 편지와 약종 자신의 일기 등이 많이 보관돼 있었다. 박해가 시작되자 약종은 안전을 위해 성물들은 농짝에 넣어 하인 임대인에게 일러 아는 신자의 집에 옮겨두게 했다. 처음에는 이 책롱을 포천 홍교만의 집에 두었다가 박해가 시작된 것을 안 다음에는 서울의 송재기 집에 두었다. 그러다가 약종 형제들의 맏형인 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더 안전한 곳이라면서 자기 집에 가져오도록 했다.

 

그런데 임대인이 그만 도중에 포졸들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됐다.

 

“아아니, 나뭇짐 속에 웬 상자가 들어있단 말인가!?”

 

농짝을 열어본 결과 천주교 서적과 당시 검거 대상자였던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 교회 관련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즉시 압수됐다. 조정에서는 사건의 중대함을 깨닫고 관련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약종은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할 것”이라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고향 마재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금부도사 한낙유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

 

“흠, 도사가 웬일이람? 혹시 날 잡으러 가는 길이 아닐까? 여봐라, 저 가마로 가서 누구를 잡으러 가는 길인가를 알아보아라. 혹시 나를 잡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거든 더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일러라.”

 

금부도사는 그 자리에서 약종을 잡아 곧장 옥으로 끌고 갔다. 혹독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떳떳하게 천주존재와 천지창조, 천당지옥, 삼위일체, 구속강생, 예수부활의 진리를 힘 있게 선포하고 증언한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했고, 신앙을 통해서 얻은 삶의 보람을 가슴 가득히 안고 하느님께 나아갔다.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많이 체포된 시기가 설명절과 추석 전후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살아 계신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돌아가신 조상들께 연도를 바치기 위해서 은신처를 벗어나 집으로 가다가, 혹은 집에서 붙잡히고는 했으니, 그 당시 신앙인들의 죽음을 무릅쓴 효행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또한 그 당시 순교자들은 삶의 보람을 얻고자 신앙을 선택했고, 그 신앙을 지키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다. 마재 출신의 정약종은 신유년 2월 11일 체포돼 그 다음날부터 심문을 받았다. 그는 책롱 속의 물건이 자기 것임을 솔직히 인정했고,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일기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이며 집에도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라’ 분명 네가 쓴 글이렷다?”

 

당시의 신자들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삼구(三仇), 즉 신앙생활의 세 가지 적으로 보았던 것인데, 지금은 세상과 이웃을 적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사닥다리로 보아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함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당시 박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임금의 조정을 가리키고, 육신은 부모가 낳아준 것이기에 이를 원수라고 보는 것은 바로 정부에 대한 반역이며, 부모에 대한 불효로 인륜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정약종은 국왕에 대한 불충과 국가에 대한 모반을 선동하는 죄인으로 선고받았다.

 

그는 선고받은 당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승훈,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고, 아들 하상 바오로가 일곱 살, 딸 정혜 엘리사벳이 다섯 살이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 줄곧 예수를 스승이요 모범으로 삼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자 했던 그는 형장에서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천주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개해서 여러분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여기는 그것들이 나에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진리를 위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유한한 목숨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고자 했던 순교자들의 신심,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삶의 지표로 다가온다.

 

[2007년 12월 27일 주님 공현 대축일 ~ 2008년 1월 31일 사순 제1주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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