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순교자가 남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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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5 ㅣ No.804

순교자가 남긴 사람들

 

 

올가을 명동에 있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서는 이 수도회의 한국 진출 120주년을 기리는 행사와 전시회를 열었다. 1888년 샬트르 수녀들이 처음으로 이 땅을 밟았을 때 맨 먼저 추진한 사업이 순교자들이 남기고 간 노부모와 그 유자녀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해주었다. 가톨릭에서 양로원과 고아원을 차려 그들을 돌보는 복지사업이 결코 우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신유박해자료집」제3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1월 7일 동부승지 홍희운은 ‘황사영의 어머니 윤혜(允惠)는 경상도 거제부에, 부인 정명련(丁命連)은 제주목 대정현에 보내 비(婢)로 삼고,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두 살이어서 교살형은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에 보내 노(奴)로 삼았다’는 의금부의 보고를 왕에게 전달했다.”

 

기록은 덧붙여 같은 날 황사영과 황심의 가산을 적몰하는 조처도 취해졌으며, 11월 8일 황사영의 일족을 유배지로 압송하라는 요청이 수락됐다고 전해준다. 황심의 아내와 두 아들도 사영의 유족들과 똑같은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순교자 본인에 대한 가혹한 처형만으로 일이 끝나지 않고 연좌로, 그것도 대를 이어 족쇄를 채웠다는 사실이다. 더욱이나 봉건사회였던 그 당시 양반의 지위에서 하루아침에 비가 되고 노의 신분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랴! 황사영과 황심의 아내는 ‘비’가 되고, 아들들은 ‘노’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의 신분, 곧 가장 천한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역사학자는 이렇게 설명해준다. “조선왕조에서 관비는 무슨 일을 했을까? 관비는 지방 관청의 허드렛일을 맡았으나 가장 보편적인 일은 ‘방지기’였다. 방지기란 중앙에서 파견되어 잠시 다녀가는 하급 관원이나 군관들과 동거하면서 그 일상생활에서 편의를 제공해 주던 존재였다. 이렇게 관비는 지방관의 명령에 따라 뭇 남성의 객고를 풀어주는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사영의 아내 명련은 ‘난주’라고도 불렸고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경상도 쪽으로 유배를 떠난 시어머니와 헤어져서 제주섬으로 향하면서 마리아는 우리에게 가슴 아리게 하는 사연을 남긴다. 정약종 순교자와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이기도 한 그녀가 남편을 잃은 뒤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면서 어떤 고통을 지불해야 했던가?

 

정난주 마리아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경기도 양근 땅 마재를 근거지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집안 형제들의 맏이인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신앙생활을 몸에 익히며 자라났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막바지에 이른 동짓달 초여드렛날, 두 살 난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난주는 추자도가 가까이 다가서자 ‘주님, 이제 경한이를 이 섬에 떨어뜨려놓아야 한답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열절히 기도했다. ‘주님, 유배형을 받은 이후로 주님께 청한 것이 바로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옵니다.’

 

마리아와 어린 경한의 유배지인 제주도와 추자도는 조선의 유배지 중에서도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유배 3천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마리아는 몸에 지닌 패물을 꺼내 뱃사공에게 주면서 간청했다. “여보세요, 이 아이만은 살리고 싶어서 청을 드리는 겁니다. ‘황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해주시어요. 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이를 내려놓았으니, 이때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던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서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봤다.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 기른 이가 바로 그곳에 사는 뱃사공 오(吳)씨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씨 집안에서는 황씨네 아이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한의 묘소가 있고, 여기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돌출한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난 경한이 놓여 울고 있던 바위이다.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다가 1909년에 제주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구(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어 곧장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해 프랑스 은인들의 손길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줄 수 있게 했다.

 

정난주 마리아는 추자섬 갯바위에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을 내려놓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 안은 채로 떠나가야 했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는 정 마리아는 그곳에서 대정(大靜)군으로 배소가 결정됐고, 관비(官婢)의 쓰라린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마리아는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어머니인 양 봉양했다. 1838년 2월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주었으며,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했고,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남편을 하느님께 바친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했다.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차기진,「사목」2000년 3월호, pp.74-76).

 

당당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황사영과 순교자들은 비록 천상의 영복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했을 테지만, 그들이 남긴 가족들은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참으로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비록 피 흘려 순교하지는 않았어도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이 ‘백색의 순교’야말로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표가 틀림없다. 특히 ‘자기의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인 평신도(「교회헌장」31항)들이야말로 일상의 가정생활과 사회 상황 안에서 흰색 순교로써 복음을 선포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2008년 10월 28일 연중 제31주일 ~ 2008년 11월 11일 연중 제33주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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