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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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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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17 ㅣ No.810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천주 신앙과 순교 사건 시대적 조명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의 천주 신앙과 순교 사건을 시대적으로 조명하면서 그들의 신앙과 순교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학술 심포지엄이 7~8일 전주교구청 4층 강당에서 열렸다.

 

김진소(호남교회사연구소장) 신부는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하느님을 속정 깊고 체온을 느끼는 부모님으로 받아들여 믿음의 토대를 닦았다"면서 이 두 순교자가 보여준 깊고 튼튼한 믿음의 뿌리가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존재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나아가 윤지충은 유교에서 천주교로 전향했지만 "자신이 성장한 문화, 특히 유교 윤리의 최고 가치덕목인 효 사상과 한국인의 정서를 하느님 신앙과 합성해 하느님께 대한 효로 승화시켰다"면서 "한국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윤지충의 믿음은 한국교회의 자긍심"이라고 밝혔다.

 

이틀 동안 10시간 넘게 이어진 심포지엄에는 300명 가까이 참석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를 비롯해 교구내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발표와 토론을 경청했다.

 

이 주교는 격려사를 통해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던지며 "이번 심포지엄에서 객관적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첫 순교자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터 위에 자리잡은 전동본당(주임 김용택 신부) 사목협의회가 주최하고 본당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안득수)가 주관해 의미를 더한 이번 심포지엄은 특히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여한 학자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서, 진산 사건과 천주교 신앙 그리고 전동성당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 심포지엄은 7일 △ 정조대 후반 탕평 정국과 진산 사건의 성격(허태용 박사/성균관대 대동문화원 선임연구원) △ 18세기 향촌사회의 변화와 민중의식(배항섭 고려대 HK 연구 교수) △ 조선 후기 사상적 변화와 천주교(이대근 신부/대전가톨릭대 교수)에 관한 발제와 토론, 종합토론으로 진행되면서 이른바 진산 사건과 그 사건으로 드러난 천주교를 시대적 배경에 비춰 조망하는 자리가 됐다.

 

이어 8일에는 △ 조선 유학의 이단론과 천주교(이이화/역사학자) △ 윤지충 권상연의 천주사상과 영혼관(금장태 전 서울대교수) △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가 한국종교문화에 끼친 영향(조현범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 한국천주교회 순교 일번지로서의 전동 천주교회(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에 관한 발제와 토론, 종합토론으로 이어지면서 윤지충 권상연의 신앙과 사상을 되새기면서 두 순교자의 순교 터전 위에 자리잡은 전동성당의 역할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주교구 윤지충 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주요 내용


순교 개념, 한국종교문화에 새로 등장

 

 

7~8일 전주교구청에서 열린 윤지충ㆍ권상연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 윤지충ㆍ권상연의 죽음을 불러온 1791년 진산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름) 후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은 윤지충ㆍ권상연의 천주 사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가 한국종교문화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한국천주교회 순교 일번지인 전동성당에 대한 자리매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다. 심포지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들을 정리한다.

 

 

진산 사건의 성격

 

진산 사건이란 1791년 진산 윤지충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이 유교사회에서 신앙처럼 돼 있는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이 드러나 관아에 체포되고 마침내 전주 남문(풍남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상제사 문제를 둘러싼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충돌로 이해되고 있는 이 사건은 천주교에서는 첫 순교자를 낳은 사건으로 중요시해 왔다. 그렇지만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 사건의 성격'에 대해 발표한 허태용 박사는 이 사건이 당시 정국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남인 체제공 계열을 무너뜨리고 정조의 정치력을 흔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견해를 개진했다.

 

이에 대해 이선아(전북대) 교수는 논평을 통해 교황청에서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진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진산 사건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그렇다면 진산 사건은 제례를 둘러싼 천주교와 유교의 충돌에 더해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정파 싸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당사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입장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천주 사상 혹은 천주 신앙

 

금장태 교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실의」와 「칠극」 같은 보유론(補儒論)적 교리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입문했지만 이 교리서들 속에서 유교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천주교 신앙의 고유한 세계를 만나게 됐고 보유론적 단계를 넘어서는 초유(超儒) 혹은 탈유(脫儒)론적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확고히 굳히게 됐다고 봤다.

 

1790년 북경 교회에서 조상 제사를 금하자 천주교 신앙집단에서 이탈한 정약전 정약용 등과 달리 윤지충 권상연 등은 오히려 유교 사회의 교화 체제를 떠나 천주교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금 교수는 그러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폐제분주의 실천으로 조선사회 법에 따라 처형됐지만 교회의 명령에 따라 죽었다는 의미보다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죽었다는 의미에서 '순도'(殉道)요 순교(殉敎)의 성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단지 천주교에서 금하기에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와 관련해 천주교의 영혼관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이 있었고 효의 근본 의미보다 형식에 얽매이는 유교제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폐제분주를 감행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가 한국 종교문화사에 미친 영향

 

조현범 박사는 19~20세기에 걸친 한국종교문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두 사람의 순교가 지니는 의미를 네 가지로 제시했다. △ 천주교와 전통 문화 특히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와의 관계가 단절됐고 △ 천주교는 핍박받는 종교집단으로서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했으며 △ 제사를 폐지하는 대신에 이를 대신하는 상장예식 곧 '연도'(煉禱)라는 독특한 의례문화가 천주교 안에서 생겨났고 △ 윤지충과 권상연을 매개로 순교 개념이 한국종교문화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조 박사는 윤지충ㆍ권상연의 순교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온 몸으로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또 '지금 여기'만이 유일무이한 현실이 아니라 참된 세계가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결단이었다"며 따라서 그들의 순교는 "한국종교문화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 일대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들의 순교를 역사 기록의 한 단락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교회 쇄신의 위기 상황에서 늘 반추해야 하는 정신적 그루터기로 간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순교일번지 전동성당의 자리매김

 

윤지충ㆍ권상연의 피가 남문 밖에 뿌려진 지 100년이 지난 1891년 전주본당(현 전동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는 완주군 소양면 대성리에 있던 본당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908년 성당 공사를 시작해 1914년에 현재의 성당 외형을 준공했다.

 

특히 전동성당 자리인 남문 밖은 윤지충과 권상연 외에도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인 유항검과 윤지헌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할 뿐 아니라 성당을 지을 때에 이들의 순교 현장을 말없이 지켜봤던 남문 밖 성벽 벽돌이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전동성당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역사의 현장으로, 또 한편으로는 유교적 가치관과 천주교 가치관이 충돌하는 가치 충돌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선 홍성덕(전주대학교) 교수는 특히 해방 이후 전동성당이 천주교 신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전주시민들의 공간으로 확대돼 왔음을 주목하면서 한옥마을의 시작점에 또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과 마주하고 있는 전동성당은 이제 가치 충돌의 상징에서 상생의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16일, 이창훈 기자]

 

 

전주 전동본당 순교자현양위, ‘… 윤지충·권상연’ 학술 심포지엄


“신앙 선조 정신·생애, 한국교회 자긍심”

 

 

전주 전동본당은 7~8일 전주교구청에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권상연’ 주제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신앙 선조의 정신과 생애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베드로)·권상연(야고보)의 신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시대적 의미를 짚어보는 학술 토론의 장이 마련됐다.

 

전주교구 전동본당(주임 김용태 신부)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안득수)는 지난 7~8일 전주교구청 4층 강당에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고, 두 순교자가 살았던 조선후기의 정치적·사회경제적·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들의 순교가 한국종교문화에 끼친 영향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 ‘한국천주교회 순교 1번지’로 불리는 전동성당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의견을 나눴다.

 

특히 이번 심포지엄에는 최기섭(가톨릭대)·이대근(대전가톨릭대) 신부를 비롯해 금장태(서울대)·조광(고려대)·배항섭(고려대) 교수, 허태용(성균관대)·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서종태(호남교회사연구소) 박사와 이이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 교회사와 한국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각 주제별 발제자와 토론자로 나서며 보다 풍성한 학술의 장이 됐다.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7일 인사말에서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신앙 선조들의 정신과 생애를 다시 선명하게 살릴 수 있다면, 오늘날 신앙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는 ‘윤지충·권상연 다시보기’란 제목의 기조강연에서 “전동본당뿐 아니라 전주교구와 한국교회는 오로지 이 루갈다 한 분에게 관심을 쏟느라 이 땅에 뿌리 깊은 믿음의 밑바탕을 닦아 놓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뒷전에 세워놓았다”고 지적한 뒤, “한국의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 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윤지충의 믿음은 한국교회의 자긍심”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심포지엄에서 나온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윤지충 · 권상연의 천주사상과 영혼관 - 금장태(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확고했던 천주신앙 · 내세관

 

윤지충과 권상연이 받아들였던 천주교 신앙의 중심개념은 ‘천주’의 존재였다. 주자학 교육을 받은 유교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정약전과 정약용 등 신서파 지식인들과 접했고,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 사상의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천주교 신앙에 입교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교 경전 속의 ‘상제’와 천주교의 ‘천주’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나 간격을 의식하지 않고 ‘천주’ 개념을 쉽게 받아들였다.

 

즉 윤지충은 ‘천주’와 ‘상제’를 동일시한 마태오 리치의 해석을 인정하면서도, 유교의 ‘상제’가 아닌 천주교의 ‘천주’를 자신의 유일한 신앙적 중심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천주’에 대한 신앙은 ‘천주’의 존재와 유교의 ‘상제’를 일치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던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적 선교논리를 매개로 삼아,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주’를 유일의 궁극존재로 확인하는 신앙의 선언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형장으로 가는 길이나 순교하는 순간까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은 「천주실의」에서 제시된 ‘천주’ 존재 중심의 보유론적 교리체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천주교의 고유한 교리체계와 기도문에 이미 익숙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상제=천주’의 보유론적 교리체계에서 ‘천주=예수’의 교리내적 교리체계로 전환한 것이요, 마태오 리치가 열어놓은 「천주실의」를 건너 천주교 신앙으로 향한 통로를 통과했음을 보여준다.

 

윤지충은 1791년 5월 모친상 때 조문객의 조문을 거절하고 ‘축하할 일’이란 발언을 했다. ‘천당에 올라가셨으니 축하할 일이지 위로할 바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발언의 사실유무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윤지충의 ‘천당지옥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줄 뿐 아니라 유교의 상례(喪禮) 자체에 대한 거부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내세중심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있었다.

 

 

윤지충 · 권상연의 순교가 한국종교문화에 끼친 영향 -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신앙 결단 통한 순교 개념 형성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를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한국종교문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 대략 네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천주교와 전통종교, 특히 유교와의 관계 단절이다. 진산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와 유교는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특히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성리학자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폐제분주(廢祭焚主)를 바라보며 천주교가 반인륜적 성격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둘째, 천주교는 한국종교문화 내에서 핍박받는 종교집단으로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 핵심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로부터 비롯한 제사 거부의 신앙적 결단이 자리했다. 진산사건 이후 양반층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교회 구성원들이 중하층 서민들로 재편되면서 천주교는 주류의 종교문화로부터 완전히 이탈했다. 그러면서 반체제적 민중종교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됐다.

 

셋째, 한국종교문화에서 새로운 역동성이 출현한 것은 주류 종교의 영역이 아닌, 소규모 신앙생활을 유지하던 천주교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종교적 혁신이라 부를 만한 징후가 천주교 내부에서 감지된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천주교는 제사문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신자들이 영위하는 종교문화의 영역에서는 제사금지령의 확고한 원칙 준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제사를 폐지하는 대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상장예식과 추념의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연도(煉禱)라는 독특한 종교문화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종교적 융합과 혁신이 발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주교를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매개로 순교(殉敎) 개념이 한국종교문화에 새롭게 등장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죽음 이후에 순교라는 관념이 천주교를 통해 한국종교문화에 새로운 에토스로 도입됐다는 의미다. 한 개인이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받아들인다는 의식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한국종교문화가 새롭게 발견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16일, 곽승한 기자, 이관영 전주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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