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교회와 생명: 자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3 ㅣ No.688

[경향 돋보기 - 교회와 생명] 자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얼마 전 우리 사회를 충격과 혼란으로 몰고 간 사건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한때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이끌던 분이 자살이라는 그릇된 방법을 통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분이 사회적으로 평범한 사람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세례를 받은 신자였기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교회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또다시 우리 사회를 대립과 반목의 소용돌이로 몰아갔으며, 이러한 소용돌이는 자살을 엄격히 금지해 온 교회마저도 비껴가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뜻을 같이 했던 사제들과 신자들은 자살한 망자를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하기도 했고, 그러한 행위를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한 사제들과 신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설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례는 받았지만 생전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비난의 수위는 그 도를 더하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러한 사태에 혼란을 느끼며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과 태도 표명이 없었음에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자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자살자를 위해 장례미사를 거행하거나 자살자가 교회 묘지에도 묻힐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

 

2008년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 및 사망원인 통계 결과’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자살로 인한 사망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7년 한 해 동안 1만 2,174명이 자살로 숨졌으며,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사망한 인원은 24.8명으로 통계청이 통계를 작성한 이후 가장 많았으며, 특히 이는 1997년 13.0명에 비해 10년 새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늘날 자살은 많은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다.

 

자살은 자의로 부당하게 자기의 생명을 끊는 행위로서 자기의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가장 큰 잘못이며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자살은 자기 사랑의 거부이고 생존본능의 부정이며, 이웃과 여러 공동체 또는 전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 생명은 모든 선의 근원이고, 모든 인간 활동과 모든 사회의 근원이고 필요조건으로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생명을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곳 지상에서 열매를 맺어야 할 선으로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므로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실망과 불신의 최종적 표지이다.

 

 

자살에 대한 교회의 견해

 

먼저 성경에는 자살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판관 9,54; 16,30; 2마카 14,41-46). 성경을 보면 자살을 직접 금지한 적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 공동선과 조국이나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했다(판관 16,30). 그리고 마태오 복음 27장 5절에는 유다가 자기의 죄책감 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자살의 사례들은 역사 안에서 발생된 사실로서 언급할 뿐이지 그 윤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법(Canones Apostolorum)은 거세한 자를 성품에서 제외시켰는데 그 이유는 거세가 하느님의 업적인 생명에 대한 살인적 침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살에 대해서도 단죄의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락탄치우스(Lactantius)는 자살을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보았고 자살과 살인을 똑같이 객관적인 악으로 보았다. 그는 자살을 옹호하는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철학자들과 유명 인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살을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이라고 했다. 실제로 모든 자살자는 살인자이며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자기 살해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무도 하느님의 직접 계시를 받지 않은 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제5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자살을 객관적 살인행위로 보았고, 구약에 나오는 자살 사례들은 단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며, 그 자체를 단죄하려고 성경에서 언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피하기 위해서나 고통과 불행한 생활을 끝맺기 위해서나 어떠한 구실로도 자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순결이나 다른 윤리덕을 지키고자 자살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로 혹평하였다. 그리고 의식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항상 죄책이 있으며, 자기 생명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윤리적으로 순수성을 잃은 사람이며 실제로 악을 행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엘비라 공의회(305년경)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순교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라고 충고하였고, 카르타고 공의회(348년)는 여러 가지 개인적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을 끊은 거짓 순교자들을 단죄하였다. 부라가 공의회(563년)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살한 자는 전례와 기도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시편을 노래하는 장엄예절 없이 매장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806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불가리아 교회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해, 자살자는 죽은 이를 위한 일반적인 장례예절 없이 매장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범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미사는 거행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살자를 매장하는 동안 다른 인간적 예를 행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Th II-II, q64, a5)에서 다음과 같이 자살의 부당성을 제시한다. 첫째, 자살 행위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자연법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둘째, 자살은 공동선과 단체에 손해를 끼치거나 모독이 될 수 있으며, 셋째, 자살은 생명에 대해서 절대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하느님의 권위를(신명 32,39) 침해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살은 감상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죽음은 오히려 사람이 최종적으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악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나 앞으로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이 두려워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자살 행위가 부당한 이유

 

오늘날 교회는 자살은 그 자체가 죄이며, 따라서 항상 부당한 행위(“가톨릭교회 교리서”, 2280-2283항)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 첫째, 자살은 십계명의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제5계명을 직접 어기는 행위로,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 모두 직접적 살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생명에 대해서는 하느님만이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며(신명 32,39), 자살은 이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고, 인간은 단지 자기의 육체와 생명에 대하여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자살은 자기를 사랑해야 되는 자연법칙에 위배되며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임무를 저버리는 것으로 더 이상의 인격성장을 막아버려 하느님께서 부르신 자기완성으로 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자살은 사회적인 면에서 인간 서로 간의 공동책임과 영향 등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로서 공동체와 이웃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 행위가 부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살로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최선의 주권행사를 하는 것이 못된다. 인간은 죽음으로 현실적 가능성만을 잃었지, 죽음을 통해서 자기가 차지할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자살이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 실행도 아니며, 또 자유 실행의 상징도 아니다. 자살은 보통 정상적 환경이나 정신상태에서 시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빼앗아간다. 인간의 죽음으로 선택의 자유를 잃는다. 죽음은 인간에게 최후의 탈출구가 못되고 ‘죽음’이란 한정된 것으로 묶어놓을 뿐이다. 따라서 자살은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자살은 영웅심과도 다르다. 자기의 과거를 보상한다거나 속죄하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 없다. 죽음으로 자기의 가능성은 모두 잃어버리는데 무엇으로 보상되겠는가? 죽음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져야 할 의무, 행할 수 있는 협조 등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인간은 사랑의 채무를 이웃에게 빚지고 있으며, 죽음은 이러한 계속적인 사랑의 증거를 배제시킨다.

 

넷째, 인간 실존의 의미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인정할 각오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을 자의적으로 종결짓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계속 찾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그 결과 그분의 은총을 수용하려고 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다섯째, 자살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모순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에도 모순이 된다. 물론 내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삶에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고통과 좌절이 있더라도 의미가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구원 희망은 이러한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자살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

 

교회는 자살이 부당한 행동임을 말하고 자살자나 자살을 기도한 자에게 대하여 또는 자살을 권고하거나 종용한 사람에 대하여 벌칙을 가하며 금지하고 있다. 1917년 구 교회법은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자살하려고 시도한 자는 십계명의 제5계명과 그 외 그리스도교 계시에 명확히 나타나 있는 신권(神權)을 침해하는 것이라 하며 자살자에게 벌칙을 부가하였으며, 이성능력과 자유의지에서 자살한 자에게는 교회 장례식을 금지시켰다. 당시 교회의 장례식이 금지된 사람들의 목록을 보면 자살자, 배교자, 이단자, 열교자, 프리메이슨(Freemason) 단원, 파문된 자, 결투로 죽은 자, 자기 시체의 화장을 요청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성의 결함으로 자살했다면 그들에게는 이 벌칙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이 벌칙의 적용은 죽기 전에 아무런 참회의 표시가 없었던 사람에게 적용되었다(구 교회법 제1240조 1항 3. 2350조 2항 참조).

 

물론 현행 교회법도 엄격하게 제1041조의 5항에서 자살을 시도한 자는 성직자가 될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했지만, 교회의 장례식이 박탈되어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제1184조 1항 3에서 특별히 자살자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신자들의 공개적인 추문이 없이는 교회 장례식을 허가해 줄 수 없는 그 밖의 분명한 죄인들”이라고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행 교회법이 이전과는 달리 이와 같은 규약을 선포한 것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을 두고 많은 의견이 있었던 것을 반영하여 법률화한 것이다. 그 예로 통계에 따르면 자살의 20%는 정신질환에서 오고 60%는 정신병적인 성격에서 오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자살 당시 자살 기도자에게는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를 발휘해 판단할 능력이 결여됐거나 부족한 상태였다고 보고 자살자의 죄에 대한 책임판단이 어렵다는 점이 교회법에 반영된 것이다. 1983년 교회법에 결투자와 자살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결투자는 시대에 맞지 않고,  자살자는 그들에 대한 판단을 피하려는 의도에서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 교리서” 2283항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유효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으며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하였고, 앞선 2282항은 “중한 정신장애나, 시련, 고통 또는 고문으로 겪는 불안이나 심한 두려움은 자살자의 책임을 경감시킬 수도 있다.”라고 하면서 자살자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목적 배려는 결코 교회가 자살자를 옹호하거나 자살을 합리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회의 배려는 자살자에 대해 교회가 무조건 단죄하기에 앞서 사목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자살자가 주위에 악한 표양을 보이지 않았다면 공개적 죄인 취급을 하기보다는 그 인간적 행위의 장애요인을 참작하여 그리스도교 애덕의 차원에서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목적 태도로 보이며, 자살자에 대한 교회 장례식의 거절 여부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 주교의 사목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교회법 제1184조 1.2항 참조). 그러나 이러한 사목적 배려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일 것이다.

 

* 김정우 요한 - 대구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인성교양학부장이다.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김정우 요한]



95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