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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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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위 시복 특집]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 ·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 지황 사바(1767~1795년) “예수님을 모욕하고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 번 만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1789년 10월,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은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품고 상인으로 가장한 채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라자로회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견진성사를 받기 전 최초로 고해성사도 받고,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도 모셨습니다. 1791년 5월에 다시 북경에 간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1794년 12월, 조선 선교사로 파견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윤유일, 지황, 최인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주신부의 은신처를 마련하는 일은 최인길이 맡았습니다. 조선에 입국한 주신부를 모시고 서울 계동(혹은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무사히 도착한 최인길은 주신부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신부의 통역을 맡아 성무 집행을 돕고 우리말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교자에 의해 주신부의 거처가 발각되고, 최인길의 집이 급습을 당했습니다. 이에 주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고, 최인길은 주신부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주신부로 가장하여 대신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날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되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주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으나 세 사람은 굴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박해자들은 이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형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인데, 세 사람은 그날 사정없이 매를 맞고 포도청 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구베아 주교는 이들의 순교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파일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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