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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설립과 한국 진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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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6]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설립과 한국 진출
머리말
한국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메리놀회는 1922년 11월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아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를 위해 1923년 한국에 진출하였다. 이후 포교성성은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을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하여, 평양 지목구로 설정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23년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2023년 10월 14일(토)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더불어 동아시아 선교 활동의 의미에 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메리놀회의 동아시아 선교사업의 의미와 평양교구사를 넘어 북한 교회사가 재조명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며,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년 국제 심포지엄을 홍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에 메리놀회의 설립,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평양 지목구의 설정 과정을 대략 살펴보고자 한다.
메리놀회의 창설과 창립자들
성장을 거듭해 온 미국 천주교회는 아직 선교 대상 국가였다. 외방 선교를 위한 신학교나 수도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외방 선교에 나서야 할 책임과 필요를 인지해 나갔다. 이에 미국 천주교회 자체 내에서 선교 활동을 보다 조직화하고 정기화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1년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가 미국 천주교 외방전교회를 창설하였다. 이 외방전교회는 1911년 4월 27일 미국 주교회의 인가를 얻었고,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의 인준을 받았다. 메리놀회는 창설 1년 후 본부를 뉴욕(New York)주 호손(Hawthorne)에서 오시닝(Ossining)에 있는 언덕으로 이전하여 이때부터 ‘메리놀(Maryknoll)’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3)
메리놀회를 창설한 월시 신부는 1867년 개신교의 교세가 특히나 강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월시 신부는 지역 개신교의 선교 프로그램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교세가 약했던 천주교는 프랑스 전교 후원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와 천주교의 선교 활동을 접한 월시 신부는 성 요한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 배우며 크게 감동하였다. 1892년 사제 서품을 받고 보스턴에서 사목하며 꾸준히 해외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해외 선교에 관한 관심과 미국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선 그는 1907년 미국 천주교의 해외 선교에 관한 잡지 『그 먼 땅에』를 창간하였다.4)
메리놀회 공동 창립자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는 미국 천주교회가 선교의 대상에서 벗어나 해외 선교 활동에 나서기를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메리놀회 설립의 기초를 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1910년 9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3차 세계성체대회에서 조우하여 외방 선교라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였고, 그것을 구체화하여 1911년 메리놀회를 창립하였다.6)
한국 진출과 평양 지목구 설정
하지만 이 지역에는 1893년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이는 등 왕성한 선교 활동으로 급속히 개신교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세 차는 급격히 차이를 보였다. 일례로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한 1923년 평안도의 총인구는 244만 1,400명에서 천주교 신자 수는 4,800명인데 반해 개신교 신자 수는 41,500명으로 9배가량 차이가 났다. 천주교는 프랑스 신부 3명과 한국인 신부 2명이 5개 본당에 50여 개 공소를 담당하였지만, 개신교는 미국인 목사 50명과 많은 한국인 목사가 72개 예배당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8)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만으로 평안도 지역을 감당할 수 없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에게 평안도 지역 선교 문제를 상의하며, 메리놀회에 평안도 지역 선교를 맡겨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급속한 교세 확장에 대응하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선교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전쟁에 징집되어 본국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오던 후원금을 받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신부들의 공백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메리놀회가 한국 선교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
평양 지목구 설정 지령을 받은 번 신부는 1923년 미국을 출발, 도중 로마에서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고베(神戶)를 들르고 이후 교토 지목구장이 될 지역이었던 교토도 방문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후 10월 22일 클리어리(Patrick H. Cleary, 吉, 1896~1970) 신부, 11월 모리스(John E. Morris, 睦怡世, 1889~1987) 신부 등이 차례로 입국하자 의주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평양 지목구 신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매진하였다. 이후 메리놀회 수녀들도 파견되어 선교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메리놀회 선교사가 계속 파견되어 평안도 지역 선교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자, 포교성성은 1927년 3월 서울 대목구에서 평양 지목구를 분리·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패트릭 번 신부를 임명하였다.
맺는말
2023년 10월 14일(토)에 있을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년 국제 심포지엄에서는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18년 메리놀회의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 선교 활동, 위에서 살펴본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과정과 의미, 1935년 일본 교토(京都) 지목구 설정의 의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메리놀회의 동아시아 선교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되새기며, 새 시대의 선교 방향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많은 분이 한국교회사연구소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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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70년대 280만 명에서 1880년대는 52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왔다. 그 뒤로도 이민자의 수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1889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에는 2천만 명 이상이 이민해 왔다(Angelyn Dries, The Missionary Movement in American Catholic History, Orbis Books, pp. 22~42).
3) 메리놀 회원들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를 1912년 뉴욕 오시닝(Ossining) 근처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간구하였고,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메리놀이 선교회의 명칭이 되었다(김성희,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4, 2004, 2593~2594쪽).
4)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월시 신부 약전(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bishop-james-a-walsh).
5)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프라이스 신부 약전(Marryknoll Mission Archives(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father-thomas-f-price).
6) 메리놀회의 창설 과정은 Wiest Jean-Paul, Maryknoll In China, Hutchinson, 1988 ;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 102~112쪽 참조.
7) 평안도 지역 천주교 신앙 전파는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30~46쪽 참조.
8)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70~74쪽.
[교회와 역사, 2023년 10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0 5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