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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폭력과 희생: 폭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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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16

[경향 돋보기 - 폭력과 희생] 폭력을 말하다

 

 

시작하기 - 학교폭력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집단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리 사회는 겨울 내내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 논의로 분주했다. 학교폭력은 학생들 사이의 일회적인 싸움에서부터 ‘일진’의 폭력과 집단 괴롭힘, 그리고 이른바 ‘왕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존재한다. 우발적인 싸움이나 일회적인 폭력사건이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고 강화되는 집단 괴롭힘 사건들을 이해하려면 학교공동체의 문화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흔히 획일화된 입시위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의 개성과 차이가 존중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획일화된 교육은 학생들 사이의 문화에서도 “획일성의 폭력”을 양산해 내는 듯하다. 튀는 행동을 한다고, 조용히 있기만 한다는 이유로, 또는 외모 때문에 때리고 맞는다. 약하고 힘없는 아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또는 그와 같은 희생양을 만들어냄으로써 다수의 동질감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이다. 여기에서 폭력적 학교문화가 생산된다.

 

이것은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폭력이며, 권력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을 내포하게 마련이다. 그 안에는 권력과 계급화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그 차별적 폭력은 전방위적으로 나타난다. ‘노스페이스’라는 등산복을 입을 수 있는 학생과 입어서는 안 되는 아이가 구분된다.

 

학교폭력의 핵심은 문화에 있다. ‘구분 짓기에 의한 차별과 폭력’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집단 괴롭힘을 주도한 가해학생이 전학이나 처벌 등으로 없어지면 그 자리를 다른 학생이 메우기 마련이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획일성의 문화는 주먹을 휘두른 몇몇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획일성의 폭력이라는 문화 자체도 결코 동질적이지 않으며, 그 안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다양한 계급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피라미드식의 다층적인 계급적 서열이 만들어진다. 그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별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가해학생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학생(더 높은 계급)과의 관계에서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학교폭력 문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폭력’이란 것이 단순히 주먹질과 같은 물리적인 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실 폭력이 무엇인가를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폭력은 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형법에는 폭행, 협박, 강요 등의 범죄행위가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폭력은 그러한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정의하자면, 폭력은 ‘타인의 인격을 침해하거나 파괴하는 힘’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폭력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양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대개 타인에 대한 통제욕구를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공통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폭력은 그 속성상 권력, 지배 등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문화로 전수되는 폭력

 

학교폭력의 예에서 보듯이, 폭력은 ‘문화’로서 전수되고 재생산된다. 다른 예로는, 학벌중심의 문화, 남성중심의 성문화 등을 들 수 있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성희롱을 ‘성폭력’의 한 유형이라고 주장해 왔다. 법적으로는 성희롱은 폭행이나 협박과 같은 물리적 폭력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강간 등 전형적인 성폭력과는 구별된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침해한다는 점에서 성희롱은 여타의 성폭력 범죄와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 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남녀 사이의 행동은 대체로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작 성희롱의 피해를 당한 여성이 어떠한 심정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시각에서 당연하다고 인식되는 어떤 가치가 우리의 행동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희롱이 ‘폭력’인 것은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된 남성중심의 지배문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일방적인 의미부여가 통용되고 전수되기 때문이다.

 

 

억압과 지배로서의 폭력 - 다양한 양태들

 

역사적으로 근대 국가의 탄생은 폭력의 국가독점을 의미한다. 시민 개개인들의 사적인 폭력행사는 범죄행위로 엄격하게 금지된다. 개인의 폭력은 정당방위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될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국가는 공동체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폭력사용을 독점하고 있다. 군대, 경찰, 형벌제도 등은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수단들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국가의 폭력독점을 정당화해 주는 한편으로 시민의 권한으로 그것의 사용을 제어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공공연한 물리적 힘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자본의 가공할 만한 위력도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IMF 사태 이후에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은 어느덧 일상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노동법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을 정당한 경영수단으로 승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폭력의 승인이다.

 

2011년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라는 거대자본의 폭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운동이었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민주노총의 김진숙 지도위원은 309일 동안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였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통해 자발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2009년 1월 20일 발생한 용산참사는 강제철거에 저항하면서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남일당 건물의 옥상에 망루를 세운 철거민들에 대해 경찰이 특공대를 동원하여 단 하루 만에 폭압적인 강제진압을 감행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의 소중한 목숨이 희생되었다. 용산사건이 발생하자 일부 국회의원과 언론은 망루농성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범’이라고 지칭하면서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재개발사업을 명분으로 행해지는 강제철거의 반인권성과 폭력성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부동산 경기에 편승하여 건설자본은 재개발사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기지만, 정작 재개발현장에서 열심히 살고 있던 수많은 서민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쫓겨나야만 한다. 재개발지역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채 20%도 되지 않는다. 재개발사업이 시행되면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생존권 박탈의 위기로 내몰린다. 수십 년간 살아온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 정한 보상금만으로는 다른 곳에 정착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철거용역회사 직원들은 각목 등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협박하고 폭행하며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망루농성은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재개발사업과 인권침해가 난무한 철거현장에서 생존권 보장을 외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자본의 폭력적인 이윤창출은 국가 공권력의 지원을 등에 업는 경우가 많다.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도, 용산참사 사건에서도 국가 공권력은 재벌의 편에 서있었다. 용산의 재개발구역에서 철거용역회사 직원들이 세입자들을 협박하고 강제로 쫓아내려고 폭력을 휘두를 때 경찰은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또한 경찰은 폭력집회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한진중공업 앞에서의 집회를 원천봉쇄하였음은 물론이고, 곳곳에 차벽을 설치하여 부산 영도로 향하는 시민들의 통행을 가로막고 버스에서 내린 시민들을 인도에 감금하는 등으로,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차단하였다.

 

 

정당성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국가에 의한, 자본에 의한, 또는 문화로 전수되는 폭력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폭력의 피해를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폭력이라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어찌 보면, “폭력은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정당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을 구별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법적 기준이 중요할 것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의 작용한계로 비례성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는 공익적 목적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필요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비례성원칙은 모든 권력행사의 기본원칙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원칙이 그 자체로 폭력/권력의 정당성에 관해 어떤 결론을 도출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공익인가, 필요최소한도란 어느 정도인가의 판단에는 필연적으로 ‘시대의 가치’가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법적 기준 자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인 것이다.

 

나는 용산참사 사건에서 망루농성을 한 철거민들이 폭력집단 또는 범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당시 철거민들의 망루농성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심각한 침해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강제진압이 정당한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유엔인권위원회는 적절한 주거권 보장의 대안 없이 세입자들을 강제퇴거시키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선언하고 있다. 강제퇴거로 생존권 박탈의 위기에 처한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외침의 수단이 망루농성이었다.

 

반면에 그들의 생존권의 외침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철거민들을 못 잡아 안달인 철거용역업체 사람들을 비호한 것은 바로 경찰이었다. 서민의 생존권 보장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진행되는 재개발사업에서 진짜 폭력은 건설자본과 그것을 지원해 준 국가권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 폭력의 증폭에 대한 우려

 

최소한 1998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한국사회에서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자본의 이윤창출의 유연성을 제고하려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제도화 등으로 노동시장을 재편하였으며, 이러한 정책은 기업 안에서, 기업 내 부서 안에서 그리고 노동시장 전반에 걸쳐 모든 개인들을 무한경쟁 관계에 예속시키게 된다.

 

사회의 연대성은 점차 약화되는 대신에, 개인은 개별화 또는 파편화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자유라는 미명 아래 놓인 이 모든 경제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과 임시고용,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는 해고위협이라는 구조적 폭력이다.”

 

이에 대응하여 신자유주의 법담론은 “개인책임의 원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본래 자유주의 이념에 근거한 근대법담론에서 개인책임의 원리는 자율적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주체들의 이성적 판단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다.

 

반면에 오늘날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개인책임의 원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불안정성과 예측불가능성에서 초래되는 위험을 개별 주체들에게 전가하여, 개인들이 그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고 ‘법질서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에 대한 대비를 스스로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젊은이들의 스펙 쌓기 열풍은 경제적 폭력에 대한 순응의 양태로 등장한 것이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철저하게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각박한 세상에서는 ‘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한다. 그 여파는 다음의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하는 ‘무관용원칙(zero tolerance)’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직후부터 이른바 ‘떼법’을 단호하게 척결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집회시위에 대하여 경찰은 모든 참가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사법처리하는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제적 폭력은 필연적으로 시민의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데, 국가권력과 신자유주의 경제체계는 사회적 불안정과 시민의 저항이 사회질서의 붕괴로 나타나지 않도록 ‘법치’를 유난히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폭력의 강도는 증가한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면 법질서를 위반한 개인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공동체에 위험을 야기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관념이 발전하게 된다.

 

둘째, 공공성의 붕괴이다.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시위가 있을 때 언론에서는 그로 인한 교통체증의 경제적 손실이 얼마라는 등의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대규모 파업의 경우에도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이미지의 추락을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다. 모든 사회적 현상은 그로 인한 이익과 손실을 따지는 ‘돈’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세상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성수되어야 할 ‘공익’의 개념은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다.

 

그래서 관건은 민주주의와 사회적 연대성의 복원이다.

 

* 이호중 사도 요한 -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이호중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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