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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12년을 돌아보며: 왜 지금 경제민주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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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995

[경향 돋보기 - 2012년을 돌아보며] 왜 지금 경제민주화인가?


“부정한 돈벌이에 대한 효과적인 주와 연방 차원의 제한조치가 없다보니 엄청나게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의 계급이 나타났다. 그들이 공공복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사하는 힘의 토대를 바꾸는 것이 최우선적 과제다.”

1901-1909년 동안 재임했던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퇴임 후인 1910년 미국 캔자스주 오사와토미에서 행한 연설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서 발호하기 시작한 대규모 독점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한 명연설이다. 당시 미국 상황이 어떠했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처럼 호소했을까.


독점 트러스트의 탄생과 해체 시도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는 철강, 철도, 석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소비재인 위스키, 설탕, 담배, 가축 사료, 철사, 못, 양철, 성냥, 육류, 우유 등 거의 모든 상품 영역에서 시장을 독점하는 기업형태인 트러스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예를 들어, 1879년 스탠더드오일 트러스트는 트러스트 증권을 나눠주는 조건으로 약 40개 석유회사의 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수탁받았다. 그 결과 록펠러 등 소수의 수탁자는 이들 석유회사들의 임원 선임과 경영을 좌우하고 석유제품 가격과 공급량을 통제해 막대한 초과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무수한 소규모 기업들이 번성하던 초기 경제발전 단계에서 대량생산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소수 대기업 체제로 시장구조가 재편되었다. 그 결과 1904년에 이르자 300여 개의 거대 트러스트들이 미국 전체 산업자본의 3분의 2를 통제하고 미국 주요 산업들의 5분의 4를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들은 온갖 탈세와 매수 등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물론 정부와 정치인들을 매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이후로 이들 독점 트러스트들을 해체하려는 주정부 법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점 대기업들은 회사의 근거지들을 옮기면서 주정부들의 규제를 무력화시켰다. 이에 미국 연방의회가 나서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90년 셔먼 반독점법이 탄생했다. 이 법에 따라 당시 몇몇 독점 트러스트가 해체되기는 했으나 위반행위에 대한 벌금액은 너무 적어 실효성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 법조계는 오히려 대기업을 편드는 판결을 내려 이 법의 실효성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이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앞길을 막아놓은 돌벽으로 보이는 것이 대기업 변호사에게는 의기양양하게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개선문 아치이다.”라는 풍자까지 나왔다.

이 때문에 당시 아돌프 벌리와 가디너 민스가 1932년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909년과 1928년 사이의 20년간 나타났던 대기업들과 모든 기업들의 성장률의 차이가 유지된다면 1950년에는 모든 기업 활동의 70%가 대기업에 의해 수행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독점대기업을 규제하고 나니…

하지만 독점대기업들의 횡포에 재갈을 물리려는 미국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1911년 당시 미국 석유시장의 90%를 차지했던 스탠더드오일을 30개 회사로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미국 담배시장의 95%를 장악했던 아메리칸토바고를 16개 회사로 분리했다. 1914년에는 셔먼법을 보완해 경쟁을 제한하는 가격차별을 금지하는 등의 클레이튼법이 제정되었고, 연방공정거래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대공황을 거치면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펼치는 한편 은행, 증권, 보험 간의 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글래스-스티걸법과 증권거래법 등을 통해 금융규제의 틀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1936년에는 개인 소매업자들을 대형 체인스토어 사업자로부터 보호하는 로빈슨-패트만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 같은 각고의 노력 끝에 고삐 풀린 독점대기업들이 점차 정부의 규제 틀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800년대 말부터 대공황 이후 시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서 민간에 맞서는 정부의 역할과 권한이 정립되었다. 이때 마련된 규제 체계 속에서 상당수의 독점기업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날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라고 불렸던 철강산업의 카네기와 석유산업의 록펠러 등 창업주들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선사업가로 변신했고, 미국은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 주주자본주의로 빠르게 진화했다. 이와 함께 21세기 전반까지 극단적으로 벌어졌던 빈부격차도 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빠른 성장과 함께 빈부격차가 크게 축소되고 대다수가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대압착(Great Compression)의 시대’로 나아갔다.


한국의 현실 - 재벌 계열사의 급증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100여 년 전 미국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삼성의 계열사는 2007년 59개에서 2011년 말 기준으로 80개로 증가했다. 2002년 삼성의 계열사 수는 64개였고,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까지는 오히려 59개까지 줄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4년 만에 21개사가 늘어난 것이다.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은 36개에서 55개, SK그룹은 64개에서 92개, LG그룹은 33개에서 61개, 롯데그룹은 44개에서 79개로 늘었다. 이런 식으로 자산 기준 상위 10대 재벌들의 계열사 수는 2007년 383개에서 630개로 늘었다. 무려 64%나 늘어난 것이다.

좀 더 범위를 확대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토지주택공사와 한전 등 일부 거대 공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재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1년 말 현재 55개 기업집단이 지정되어 있다.)의 계열사 수를 보면 2008년 1,069개에서 2011년 1,621개로 늘었다. 그동안 재벌들의 계열사 확장 행태를 문어발로 표현해 왔지만 이제는 지네발 수준까지 온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경영 전면에 나선 재벌가 3,4세들의 사업거리를 확보해 주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측면이 크다. 그렇게 해서 재벌 3,4세들이 ‘가만히 앉아서 돈 먹기’식의 사업 확장과 진출이 잇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21세기 대명천지에 중세 봉건왕조나 북한의 세습체제와 맞먹는 재벌 세습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익히 알 듯이 대형 마트 하나만 봐도 그 주변의 재래시장이 초토화되고 동네상권이 무너지는 것은 다반사다. 재벌 계열사들이 활개 치면서 대한민국 중소기업들과 자영업자들이 ‘떡실신’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속도로 계속 재벌 계열사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추세로 계속 늘어난다면 현재 630개인 상위 10개 재벌 계열사 수는 1,000개를 넘고, 2030년경에는 1,500개를 넘게 된다. 현재 55개 기업집단의 계열사 수는 2020년 약 2,200개, 2030년 약 3,000개까지 늘게 된다.

지금보다 재벌 계열사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을 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얼마나 심각해질까. 재벌 그룹 3대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떡실신’하고 있다. 재벌 그룹 3세가 이 정도인데, 4세, 5세까지 이런 추세로 대물림을 하고 계열사를 확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질식하고, 일자리는 줄어들며 극단적 양극화가 계속 심화될 것임은 뻔하다. 그런 경제를 원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그 같은 현실을 바꾸기를 원한다.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

우리는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경제적 여건도 자연스레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님을 외환위기 이후 시련의 10여 년을 보내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안타깝게도 민주화 이후 정권 교체는 해봤어도 재벌과 토건으로 표상되는 경제권력 교체에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치적 민주화의 외피에도 우리의 경제생활은 ‘삼성공화국’이나 ‘토건국가’에 의해 사실상 지배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삼성 등 재벌들은 정부와 정치권을 움직이고 언론을 길들이며 사법 시스템을 우롱하고 있다. 일반 유권자들은 수십만이 투표를 해야 겨우 자신들이 원하는 국회의원 한 명을 국회에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삼성과 같은 재벌들은 돈의 힘으로 재벌 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을 100명 이상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들 기득권 세력은 한국경제의 자원을 독점하고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와 정책들을 만들어 지속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다수 국민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부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점점 집중되고 있다. 결국 정치적 민주화라는 외피는 걸쳤으나, 경제적 민주화는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 민주화라는 외피 속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서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라는 것은 정치민주화에 걸맞게 경제적 자원배분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재벌이나 건설업계 등에 대한 과도한 특혜를 폐지하고 오히려 서민경제를 돌보는 데 국가의 자원과 에너지가 배분되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벌총수들도 똑같이 법 앞에 평등하게 심판받고, 돈 없는 가계도 상당한 교육기회와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같은 경제민주화는 사실 정치민주화와 병행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정치민주화와 함께 병행 발전하지 않으면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쉽게 퇴보하고 만다.


기득권 위주의 논리와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만 달성되면 공정하고 건전한 경제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줄 알았다. 민주화운동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에 가졌던 낙관적 기대였다. 사실 초기에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1987년 이후 군부출신인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지만 한국사회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출했던 각종 사회경제적 의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토지공개념이 도입되어 택지소유상환제, 개발부담금제, 토지초과이득세가 추진되었고,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도 이뤄졌다. 그 결과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사회는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눠졌던 시기였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한 해 15-25%씩 성장했던 시기이고 노동소득 분배율이 이 기간에 53% 수준에서 63% 수준까지 가파르게 상승했다. 하위 10% 소득 대비 상위 10% 소득의 배율이 8.4배에서 6.9배 수준까지 떨어져 소득격차가 큰 폭으로 줄어들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12% 전후의 성장을 했고, 1990년대에는 7-8%대의 성장률을 이어갔다. 흔히 말하는 성장과 분배가 함께 좋았던, 한국경제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방심했고, 그 같은 정치적 민주화에 기반해 경제권력을 교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김대중 · 노무현 정부라는 민주적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는 훨씬 더 기득권 위주의 논리와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김대중 ·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대북정책 등에서는 큰 진전을 이뤄냈다. 반면 부동산 거품과 가계부채,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사교육비와 비싼 대학등록금, 저출산 고령화문제 등 민생경제는 이 기간에도 퇴보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이 두 측면 모두를 빠른 속도로 악화시켰음은 불문가지다. 그 결과 재벌들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지만 서민경제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상태다. 그리고 민생경제가 무너지는 가운데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또한 급속도로 퇴보할 수 있음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 절호의 기회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대북정책을 본궤도로 올리고 민생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 하는 두 과제를 함께 갖고 있다. 곧 정치적 민주화는 더욱 공고하게 발전시키면서도 그동안 소홀히 했던 경제민주화를 달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수의 기득권층만이 아닌 대다수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경제민주화가 절실한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

탈토건과 재벌개혁, 조세 형평성 확보와 재정개혁, 공정경쟁 질서 확립, 비정규직 해소 등 노동시장 개혁 등이 그 구체적 과제들이다. 이 과제들을 달성해야 한국경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진정한 경제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행히도 지금 정치적 여론지형은 매우 좋은 편이다. 재벌개혁과 탈토건, 복지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개혁적 정책의제들에 대한 여론의 지지와 호감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여야 정당들이 앞다투어 재벌개혁 등 경제민주화와 조세재정 개혁 등 개혁적 정책의제들을 선보이고 있다.

물론 정책의제들과 미사여구들이 얼마나 실제로 다음 정권에서 실행에 옮겨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참여하는 유권자와 이들 유권자들의 여론을 반영하려는 정치권의 노력이 만나면 경제민주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다.

* 선대인 -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이다. 전 동아일보 기자로 1999년 한국시티뱅크 선정 올해의 경제기사상을 받았다. 저서로 「문제는 경제다」, 「세금혁명」, 「위험한 경제학」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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