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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12년을 돌아보며: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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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996

[경향 돋보기 - 2012년을 돌아보며]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2012년 한국사회의 ‘폭력’

‘폭력’은 먼저 인간관계 차원의 왜곡으로 인한 배제와, 다음으로 사회구조 차원의 억압으로 인한 소외를 정당화 또는 합리화하는 도구로서 기능할 때,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다. 곧 폭력은 사람과 사회공동체를 왜곡하고 억압하고 파괴한다.

억압 - 소외로 야기되는 폭력으로서, 2012년에도 계속 반복되면서 해결되지 않은 큰 문제는 노동자-빈민에 대한 구조적 폭력 문제이다. 이에는 특히 쌍용자동차 문제, 용산 사태, 삼성 반도체 문제, SMJ용역폭력 사태들이 주목받고 있다.

우리 전통사회 문제점과도 이어지는 가정폭력 문제는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연계되는 가부장제적 성폭력 문제, 그리고 성의 상품화 현상으로 인하여 대두되는 이른바 ‘음란사회’가 성폭력을 부추기는 현상들은 수그러들 기미 없이 계속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왜곡 - 배제로 야기되는 폭력은, 그로 인하여 한 개인의 생명성을 배제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와 관련한 문제로는, 고령화시대가 될수록 더욱 심화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약자로 바뀌는 노인에 대한 폭력적 소외 - 배제로 인한 ‘자살’ 증가 문제가 있고(2009-2011년 OECD국가 중 1위), 2012년에 떠오르면서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학교폭력(왕따, 일진…)과 이에서 야기된 청소년 자살 문제가 있다(지난 10년간 2배 증가, 청소년 사망 원인 1위). 특히 학교폭력 문제는 대통령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담론화되었고, 결국 보수-진보의 진영논리로 이어지면서 학교폭력의 학생부 기재 문제 등등으로 논란이 증폭되었다.

지나친 음주 문화의 부산물인 주폭(酒暴)문제는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으나, 예방과 치료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제주 올레길 살인 사건처럼, 우울증, 신경증, 반사회적 성격(사이코패스…) 같은 정신적 질환자가 불특정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묻지마 식 폭력’ 문제도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인격적 왜곡 - 배제 문제와 구조적 억압 - 소외 문제가 뒤엉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인 ‘사이버 폭력’도 큰 문제였다. 이전에는 출판물로 인한 명예훼손과 인격모독 전파라는 이른바 ‘글폭’ 수준이었지만, 사이버 공간이 모바일 기기의 확산으로 활성화되면서 강력한 폭력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 이른바 ‘최진실 사건’으로 사회적 주의가 대폭 환기되었음에도, 사이버테러는 수그러들 기미 없이 확산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고 판단된다.

개인적 인격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 수준에서부터, 사회적 인격에 대한 ‘안티 카페(타진요…)’, 더 나아가서는 반대 정파에 대한 전업적인 ‘안티 언론(나꼼수…)’들에까지 이르는데, 그 파괴력은 최근 몇몇 사태에서 보이듯이 가공할 수준을 보여주기도 했다.

곧 사이버 폭력은, 개인에서 정파에까지, 일상의 폭력에서 조합주의적 - 구조적 폭력에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특히 정치적 조합 - 진영의 논리를 용감하게 대변하는 폭력성으로 무장된 사이버 인격체들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고, 폭력 가해자가 거꾸로 더 큰 폭력의 정당방위를 운운하면서 피해자에게 폭력성을 뒤집어씌우는 사태까지 이르기도 한다는 판단이다(이른바 패권주의적 행태).

2012년은 정치의 계절, ‘대선의 해’라서 폭력성의 문제가 더 이슈화되기도 했다는 생각이다. 이른바 ‘진영’논리의 문제이다. 정치적 언론 - 조합들은 작은 일이라도 크게 만들어 정치담론화하려는 경향들에 특히 빠져들기 쉬운데, 예컨대 학교폭력 - 성폭력 - ‘묻지마 식 폭력’ 같은 경우는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현 단계에서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정치 담론화로 해서 더 큰 이슈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전문인 - 지식인들조차 ‘진영논리’에 매몰된 나머지, “비록 하늘을 덮는 죄가 있어도 떼 지어 일어나 돕고….” 하는 과거 조선시대에 당쟁망국론을 폈던 이중환의 한탄이 그대로 들어맞는 식의 타락 현상이 계속된다면, 결국 심각한 구조적 폭력을 부르게 될 것이다. 하다못해 ‘생명문화건설’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교회 공동체의 노력조차, 진영논리의 톱니바퀴의 하나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버리는 흡인력을 지닌다는 판단이다.


2012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폭력’ 문제 대응

2012년 한국사회의 폭력적 상황과 비교하면서, 교회의 대응을 살펴보면, 교회 언론기관 중 ‘폭력’을 편집의 중심으로 계속 제기했던 매체는 「평화신문」이었다. 또한 2012년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나타나는 중요한 성명서나 심포지엄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폭력성과 관련하여 교회가 이들 문제들과 동반하면서 발표한 핵심 내용들을 파악할 수도 있다.

5월 ‘인천교구 2012년 노동자주일 담화’에서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그로 인한 노동자 가정의 해체, 나아가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은 노동의 문제가 특정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 전체의 ‘본질적인 핵심’이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짊어져야 할 공동의 책임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 자본은 있지만 ‘인간’이 없고 이윤은 있지만 ‘인간다움’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사라진 꼴입니다.”라고 하여 ‘정의와 공동선’에 입각하여 경제구조적 폭력에 대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달에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갑시다.’라는 ‘5대 종교 대국민호소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6월 ‘201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에서는 특히 탈북자들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낯선 땅에서 갖은 인권 유린을 당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그들도 역시 우리의 동족이며 가족들입니다.”라고 하여 북한 주민들의 폭력적 현실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수원교구 역시 ‘탈북자와 북한 어린이를 위한 기도와 희생’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탈북 주민들을 지원하고,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식 제공을 촉구하기도 했다.

8월 ‘제주 강정마을의 성체훼손 사건에 대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입장’에서는 “경찰 등 공권력은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집회에 강압적, 폭력적으로 대응하였고,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종교 집회인 미사에 난입하여 사제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라고 항의하고 있다.

10월 ‘사형제도폐지 생명 이야기 콘서트, 평화로 생명을 노래하다’에서는 “최근 일어난 여러 참혹한 사건들로 인해 국내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 잔인한 강력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문제에 다가섰다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둡고 추워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생명의 문화를 노래하고 평화를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촉구하여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여 없애자는 세속적인 요구를 ‘법의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으로 규정하고, ‘사회의 연대적 책임 의식’을 환기시키면서 이를 새로운 생명문화 건설의 동력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에서는 2012년 11월 세미나 주제로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 예방,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채택하기도 했다.

곧 전체적으로 눈에 띄는 내용들은, 쌍용자동차 등 해고노동자 지원문제, 사형제 폐지 반대와 엄격한 법집행 촉구에 관한 논란, 계속되는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에 대한 공동체적 대응 문제, 제주 강정마을의 폭력적 성체훼손 사건, 북한 주민의 폭력적 상황에 대한 지원 촉구들이다.

곧 2012년 교회의 ‘폭력’ 문제에 대한 대응 중, 노인 자살 문제, 사이버 폭력 문제, 묻지마 식 폭력 문제, 그리고 패권주의적 폭력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동반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큰 틀에서 볼 때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정진석 추기경님의 사목 방침이 ‘사회구조적으로 억압 - 소외되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기’에서부터 ‘인간적 - 환경적으로 왜곡 - 배제되는 이가 없는 생명문화의 건설’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의 ‘폭력’ 문제에 대한 교회의 폭넓은 대응 노력들로 나타났다고 판단된다.


언론과 사회의 해석과 대응 - 해결 방안

억압 - 소외로 이어지는 구조적 폭력 문제 중에서 노동자 - 빈민 문제는 대체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집단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대응 - 저항이라는 전통적 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곧 “폭력이든 폭력의 묵인이든 그 어떤 경우도 불법이다. 시민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국가에 경찰력이라는 공권력을 위임했다. 그런데 우리는 폭력을 용인하는 국가를 체험하고 있다.”(박동호 신부, 「평화신문」 1179호, 8월 19일)는 입장이다.

성폭력 문제 중에서 가부장제적 성폭력 문제는 생존자 - 피해자들의 치유와 가해자들의 인식전환 지원들로 해결하자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부장제적 폭력 외에도 성의 상품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음란사회’에 대한 정화 노력과 제도적 정비 노력들이 특별하게 강조되고 있다.

왜곡 - 배제로 야기되는 폭력 문제로서, 왕따 등의 학교폭력, 그로 인한 청소년 자살 등, 기본적으로 ‘생존경쟁’이 심각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병리 현상에다가 심리적 불균형 등 제반 복합적인 원인이 동반되는 문제들은, 함께 가면서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주로 모색되고 있다.

피해학생 보호, 가해학생 교정, 학교당국의 회피-은폐 문제 해결 같은 법적 - 제도적 보완 외에도, 정 추기경님의 말씀대로, 상호 연대적 책임감을 가지고 가정과 학교공동체가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다양한 노력과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중에서 청소년 뮤지컬-연극 체험, 맞춤형 숲-녹색 체험같이 나눔과 소통에 바탕을 둔 자기실현의 청소년 문화 건설을 통하여 폭력성을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특히 주목된다.

노령화사회(고령화사회)로 빠르게 진입해 가면서 사회적 약자로 바뀌는 노인의 인격적 배제로 인한 자살 문제, 지식정보화 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증가일로에 있는 사이버테러 문제들도 실제로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지식정보화(인터넷) 시대의 ‘글폭’인 사이버테러 문제는 조합주의적 - 정파적 여론매체들에 의해서 불신 - 증오 - 회의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이로써 전개양상도 잔인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xx급사(急死)’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법적-제도적 보완 필요성 등등 이런저런 논의는 있지만, 아직 출산율 감소 문제와 맞물린다든지, 표현의 자유 문제 또는 정치적 진영논리 문제들과 맞물리면서 본격적인 논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사회의 대응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한 시대의 구조적 억압 - 소외 문제보다 통시대적인 인간적 왜곡 - 배제 문제가 더 근본적이며 오랜 문제임을 알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산업시대의 담론적 상황에 지나치게 말려들면, 미래 지식정보화 시대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입각한 해석과 해결 방안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폭력은 ‘생명에 대한 폭력’이고, 이는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동시에 하느님을 잃은 이 세상의 ‘폭력’은 억압, 곧 구조적 - 제도적 폭력과 함께 간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문화’ 건설 차원에서 폭력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은 근본적이고도 올바른 방안이라 하겠다.

그런데 2012년 교회의 ‘폭력’에 대한 대응을 검토해 보면, 우선순위가 사회의 구조적 폭력 부분에 너무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 아니 모든 폭력의 문제를 사회 - 국가의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치환시켜서 풀어나가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를 느낀다.

오늘날은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화 사회로, ‘민족의 시대’에서 ‘세계시민의 시대’로 바뀌고 있는 변화의 시대이다. 이제까지의 세속적 풍요 - 명성 - 권세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세속적 풍요 - 명성 - 권세들이 성립해 가고 있는 권위 파괴의 시대이기도 하다. 전통적 형식의 가정 - 가부장 - 전문지식인 - 성직자들의 권위가 새로운 권위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변화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세속적인 ‘세상의 유비’를 써서 대응하기보다, 원초적인 말씀으로 돌아가서, ‘신앙의 유비’를 써서 폭력적인 현실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 교회 역시 그 전 단계까지의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권위의 인간 - 공동체에 대한 억압과 왜곡, 곧 폭력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말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의인 - 의로움’의 권위로 대체해 놓았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교회 역시 무엇보다도 가난과 자기 비움의 영성, 형제애와 박애에 바탕을 둔 폭력 문제 해결이라는 접근, 바로 ‘의인’들이 있을 자리, ‘의로움’이 거처할 자리를 제시하고 마련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 입각해 볼 때, 폭력은 하느님 사랑, 하느님과 인간의 서로 사랑, 이에 바탕을 둔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억압하고 왜곡하고 파괴하는 거짓된 힘이기도 하다.

하느님 사랑의 문제는 결국 내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주인의식’을 깨닫는 문제라 하겠다. 이웃 사랑의 문제는 결국 ‘내 몸과 같은 이웃’,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리면 ‘또 하나의 나’, 동아시아적 표현을 쓰면 ‘작은 나(小我)’를 넘어서는 ‘큰 나(大我)’를 보고 받아들이고 확장해나가는 ‘주체 의식’을 깨닫는 문제라 하겠다. 곧 인간, 인간공동체의 폭력성 문제를 근본에서 풀어나가려 한다면, 결국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박광용 아우구스티노(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인문학부 국사학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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