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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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6.25 때 순교한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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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1-27 ㅣ No.861

[인물탐구] 6.25 때 순교한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


죽기까지 진정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7월 11일은 초대 평양지목구장이며 초대 주한 교황사절이었던 순교자 제임스 패트릭 번 주교가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해외 순방 중이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를 대신해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체포된 날이다.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거의 잊혀졌던 6ㆍ25 순교자 번 주교는 지난 6월 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의 착좌때 재조명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7월 11일 번 주교 체포일을 맞아 추모의 뜻을 담아 사제로서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의 삶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낯선 이방인으로 구경거리가 되며 이곳 주민들이 복음의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정을 알고 나니 이 깊은 산간 지방의 구령사업이 지형적 장애로 인하여 지체될 수 없음은 물론 일단 밭가는 쟁기에 손을 댄 이상 돌아설 수 없고 비켜설 수도 없다. 그 수확은 극히 적은 것에 머물지라도 계획과 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1926년 본당 설립을 위해 중강진을 답사하면서).

 

초대 평양지목구장이며 초대 주한 교황사절인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제임스 패트릭 번(James Patrick Bymeㆍ한국명 방일은) 주교.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과 목숨을 맞바꾼 메리놀회 첫 순교자. 번 주교는 메리놀회 신부들로부터 「조용한 아침의 순교자」 「한국인 패트릭」등으로 불린다.

 

번 주교는 「주님이 아니시면」(Nisi Dominusㆍ시편127편)을 사목표어로 정하고 주교 문장 안에 「무궁화」를 넣을 만큼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분이다.

 

번 주교는 사목표어로 시편 127편 「주님이 아니시면」을 선택한 이유를 『「주님이 아니시면」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아래에서 느끼는 절대 공포의 예언입니다. 한국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면, 국민들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내리지 아니하면 민주주의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교에 물들었던 나라들의 잘못을 꼭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은 영적인 상징이며, 자연을 넘은 초자연적 삶을 강조하는 말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신학교 입학 당시부터 해외 선교를 꿈꿔 왔던 그가 아시아 특히 한국과 숙명적 인연을 맺게 된 때는 바로 1922년 11월 메리놀회가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으면서다.

 

당시 신부였던 번 주교는 그해 11월 27일 한국 지부장으로 선출, 1923년 5월 10일 한국에 입국했다. 메리놀 신부들의 선교로 평안도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자 교황청은 1927년 3월 17일 평양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으로 번 신부를 임명했다.

 

『「거룩한 냉장고」(성당)에 신자들은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와서 냉기에도 상관없이 미사에 참여하고 끝난 다음에도 성당에 오래도록 남아 기도를 합니다. 때로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포도주가 얼어 손으로 성작을 감싸고 입김을 불어서 녹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번 신부는 1928년 8월 미국에서 개최된 메리놀회 총회에서 제1참사 위원으로 선출돼 지목구장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1947년 8월 12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된 번 신부는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됐다. 번 신부는 그해 10월9일 입국하는 즉시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 교황청이 세계 최초로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천명했다. 번 신부는 또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정식으로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승인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했다.

 

1949년 4월 17일 가제라 교구 명의 주교로 임명 6월 14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진 번 주교는 1949년 5월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불법 납치되는 등 북한 교회 상황이 악화되자 북한의 종교 박해를 신랄히 비판해 북한 공산 정권으로부터 무서운 보복을 하겠다는 협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번 주교는 일부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뒤 교황대사관을 지키다가 7월 11일 보좌 부드(WㆍBooth)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체포, 서울소공동 삼화 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인민 재판소에서 『만약 라디오를 통해 미국과 유엔, 교황청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사형을 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자 『나에겐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주어졌다. 즉 죽음뿐이다』라고 강변했다.

 

번 주교는 이후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를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62세 나이로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동료 성직자들에 의해 하창리 마을밖에 안장됐다.

 

번 주교는 「죽음의 행진」 도중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소원이었소. 하느님께서 이 은혜를 내려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오』라며 『사제직 다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가장 큰 축복은 한국교회에 봉사할 수 있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했다.

 

죽음을 앞두고 한 그의 말처럼 번 주교는 진정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번 주교(1888-1950) 이력

 

△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에서 10남매중 일곱 번째로 출생

△ 1908년 메릴랜드 주 케톤스빌의 세일트찰스 대학 졸

△ 1909년 9월 볼티모어 교구 세인트 메리신학교 입학

△ 1915년 6월 23일 사제수품, 메리놀 외방전교회 입회

△ 1918년 6월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 메리놀 버나드 소신학교 교장

△ 1922년 11월 27일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선출

△ 1923년 5월 10일 한국 입국

△ 1927년 3월 17일 초대 평양지목구장 임명

△ 1928년 8월 메리놀회 제1참사위원으로 선출, 평양지목구장 사임. 미국 귀국

△ 1934년 7월 21일 메리놀회 일본 지부장 임명. 일본 입국

△ 1937년 7월 17일 교토 초대 지목구장 임명

△ 1947년 8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초대 주한 교황 사절 임명

△ 1947년 10월 9일 한국 입국.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는 교황청 문서 발표

△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정식 승인 받도록 적극 노력

△ 1949년 4월 5일 한국천주교중앙회 발족

△ 1949년 4월 17일 가제라 교구 명의 주교 임명

△ 1949년 6월 14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로 성성

△ 1950년 7월 11일 공산군에 체포ㆍ인민 재판 통해 사형선고

△ 1950년 7월 19일 평양 감옥 수감, 9월 5일 만포 이송, 11월 7일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 수감, 11월 25일 62세로 순교

 

[가톨릭신문, 1998년 7월 19일, 리재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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