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7) 가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12 ㅣ No.958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7) 신적 섭리의 동나지 않은 자금 - 가난


가난을 추구한 성인은 왜 값비싼 인쇄기를 사용했나?

 

 

콜베 신부가 세운 니에포칼라누포(성모의 마을)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1927년 두 명의 사제, 콜베 신부와 그의 친동생 알폰소 신부와 17명의 형제들로 시작한 공동체는 1938년에는 800명 가까운 숫자로 늘어났으며, 이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톨릭 공동체에 해당하였다. 처음에 약 6만 부 정도가 발행되던 ‘성모의 기사’지는 100만 부로 늘어났고 간행물 종류도 8종에 이르러 매년 1600톤의 종이를 소모할 만큼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다.

 

 

하는 사도직마다 성공, 그 비결은

 

그는 출판사업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 영역을 가능한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모험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 선교 중이던 1932년에 그의 계획에 따라 형제들로 구성된 소방서가 세워졌고 1938년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심지어 그는 공항을 만들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반적으로 수도자들이 하는 일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형제들은 그의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을 걱정하며 충고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도를 성공으로 연결시켰다. 성모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는 것은 그의 열망이자 동시에 은사였다.

 

콜베 신부의 이런 성공 비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난’의 추구였다. 그는 ‘가난’이야말로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왜곡 없이 퍼져 나가게 하는 매개이며 모든 사도직의 성공 수단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는 프란치스칸 가난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그 거룩한 정신을 철저히 보존하고 더욱 성숙시켰으며 시대에 적합한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거룩한 가난은 그의 내적 외적 삶을 지켜주는 안정장치인 동시에,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 섭리의 바닥나지 않는 자금”이었다.

 

그는 모든 사도직의 출발점은 가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가난이라 함은 단순히 물질을 소유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 만물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감추어진 창조주의 선하심과 본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피조물을 필요와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 본성적으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며 그 대가로 영적인 재화를 상실하고 마음의 굳건함이 약해진다고 콜베 신부는 경고한다. 그런 시각은 인간과 세상의 올바른 관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선함에 심각한 해를 끼치고 나아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영적인 재화를 상실한 이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고 사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사도적 활동의 궁극적인 성장은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가난을 통해서 예수님께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는 이러한 정신에 따라서 니에포칼라누프와 그의 모든 선교 전초기지에서 일관되게 ‘가난’을 강조하였고, 공동체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난의 기준을 세웠다. 예를 들어 수도원 건립에 있어서 “그 집은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거나 더 가난한 모습”이어야 하며, “건설의 기준은 안정성과 미리에 대한 필요성의 최저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그는 니에포칼라누프의 건물들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저 잠시 머물렀다가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을 만큼 검소한 모습으로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제들이 집의 안락함에 묶이지 않고, 하느님과 수도회의 소명에 따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는 “엄격한 가난,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 그리고 개인적인 필요의 가능한 한 최저치”만이 공동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 사업 수행에 걸림돌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콜베 신부는 ‘가난’이 그 자체로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내적이고 개인적인 삶은 늘 엄격한 가난을 지켜야 하지만, 구태의연한 가난에 매어 그것이 걸림돌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가난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일 뿐 절대적인 수덕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콜베 신부는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는 극도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데에는 어떠한 장애가 있어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어느 날 니에포칼라누프의 인쇄소를 방문한 한 사제가 ‘성모의 기사’지를 인쇄하는 값비싼 기계들을 가리키며 “만일 성 프란치스코께서 이 값비싼 기계들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요?”라고 비꼬듯 말하자, 콜베 신부는 “그분은 분명 양 소매를 걷어부치시고 가능한 한 많이 기계의 속도를 가속시키시며, 최고의 현대적 수단을 써서 하느님과 성모님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 있는 형제들처럼 일하시겠지요”라고 대답한다.

 

콜베 신부는 세상의 만물, 나아가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각종 기계들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합당하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수단들, 최신 기계 혹은 노동 시스템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통해서 영혼을 성화시키는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우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으나 얼마든지 하느님 사업에 활용할 수 있으며, 이는 오히려 창조 본성에 부합하는 일이 된다고 콜베 신부는 믿었다.

 

니에포칼라누프(성모의 마을)라는 이름처럼, 그곳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성모님께서 일하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수사들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완전히 봉헌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도 포기해야만 했다. 콜베 신부는 “어떤 일에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완전히 성모님께 봉헌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활동을 제한할 계획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모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이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적인 계획마저 소유하기를 거부하며 철저한 가난의 삶을 추구한 콜베 신부의 삶은 역설적으로 늘 자유로왔으며 그래서 그는 모든 일에서 항상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한 가난은 외적이고 수동적이며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도 믿음을 두지 않는 진정한 가난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난 안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한 분이신 하느님의 창조물로 바라보았으며 그것들이 창조주를 마음껏 찬미할 수 있도록 이용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 속에서 끝없는 포기와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섭리의 바닥나지 않는 자금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4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1,17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