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창조주에 저항하는 생명자본주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30 ㅣ No.876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창조주에 저항하는 생명자본주의

 

 

유전자는 하느님의 생명 설계도

 

유전자는 생명체의 모든 현상을 집약해 놓은 생명의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얻으려면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시키고 그렇게 하여 얻은 영양소를 세포 안에서 다시 분해하여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에는 예외 없이 효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효소 하나하나는 유전자가 지시하여 준다. 다시 말해 유전자는 생리적 프로그램이고 효소는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가 정해준 계획 또는 운명대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쌀밥을 먹어 소화시킬 수 있는데 종이는 소화가 되지 않는다. 이 말은 사람에게 쌀을 소화시키는 유전자는 있지만 종이를 소화시키는 유전자는 없다는 뜻이다.

 

한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들을 총체적으로 유전체(게놈)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혼용하고 있다. 요약하면 유전자는 생명의 설계도이며 동시에 생명 현상의 프로그램이다.

 

똑같은 벽돌을 가지고 건축을 하는 경우에도, 설계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청와대 설계도대로 건축을 하면 청와대가 되지만 명동대성당의 설계도를 따르면 명동대성당이 된다. 생명체에서 설계도를 그릴 때 사용하는 벽돌문자가 바로 DNA라는 물질인데, 이 DNA의 배열 순서에 따라 생명체가 달라진다.

 

사람과 대장균, 그리고 나팔꽃의 차이점은 DNA 배열 순서(유전체)가 서로 다를 뿐이다. 사람은 타고난 유전자대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서 선천성 유전병을 앓기도 하고 중간에 암세포가 생겨 암에 걸리게도 된다.

 

유전자 변이란 바로 DNA의 배열 순서에 이상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설계도면에 구멍이 나거나 순서가 바뀌기도 하는 셈이다. 따라서 수많은 생명과학자들은 유전자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으며 변이가 일어난 유전자를 다시 원상복귀시키거나,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변경시켜서 인간의 생활에 유익하게 하려는 꿈을 키워왔다.

 

모든 난치병을 완벽하게 치료하고, 유전자 변형 식품을 개발하여 풍부한 식량을 생산하며,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등 장밋빛 약속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인간 복제까지 상상하며 엄청난 이윤 창출의 야심을 갖게 되었다.

 

 

베일을 벗은 유전자의 비밀

 

사실 오늘날 생명공학의 시대를 열어준 사건은 1865년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출발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였던 멘델(Gregor Mendel)은 수도원 뜰에 완두콩을 심고 7-8년 동안 계속하여 유전 현상을 관찰하였고, 그 유명한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멘델의 법칙을 바탕으로 유전학이 급속하게 발달하였고 DNA의 구조가 알려지면서 과학자들은 유전의 본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에 이른다. 20세기가 마감될 무렵에는 인간 유전체 계획(Human Genome Project)에 따라 생명 설계도의 초벌 해독이 완성되었고, 21세기는 바야흐로 유전체를 구체적으로 해독하여 실제 생활에 응용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는 DNA 재조합 기술 등 유전자 조작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유전자 치료법, 줄기세포의 이용, 유전자 변형 식품의 대중화 등을 통하여 이미 유전학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멘델 유전학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생명공학에 이르는 동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멘델에게 생명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완두콩의 색깔, 모양, 키 등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는지에 관심이 있었지 콩의 생산량 제고나 콩의 맛을 개발하여 소득을 증대하는 등에 목표를 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멘델의 연구는 생명 현상의 탐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한 창조의 원리를 깨닫기 위한 도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과학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많은 생명과학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생명 현상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에서 비롯된다.

 

또 그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질병을 치료하고 식량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생활에 직접적으로 응용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생명공학의 발달은 멘델적 생명관에 심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생명은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고 효율적 이용의 대상이 되었으며 급기야 생명 경시풍조의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생명 특허의 대상이 된 유전자

 

인류의 문명 발전을 촉진하는 주요 원인에 따라 역사의 발전 단계를 차례로 살펴보면 군사주권시대, 정치주권시대, 경제주권시대, 과학기술주권시대를 거쳐서 현대는 바로 생명(유전자)주권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유전학을 포함한 생명공학이 현대의 인간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생명(유전자) 자체가 돈벌이의 주요 수단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생명을 수단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생명자본주의(biocapitalism)가 탄생하였다. 생명이 이윤 추구의 주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자유시장경제를 기치로 내걸고 모든 것을 경쟁으로 내몰아 성장지상주의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로 정착되어 있다. 탐욕의 상징이었던 미다스의 욕망도 꺾이고 값이 싼 천한 금속으로 황금을 만들려고 했던 중세 연금술의 시도도 무산되었지만, 인간은 또 한번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명 조작을 향한 대장정에 들어간다.

 

미생물유전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로서 록펠러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였던 레더버그(Joshua Lederberg)는 이러한 생명조작의 신기한 기술을 일컬어 ‘생명연금술(algeny)’이라고 이름 붙였다.

 

다분히 중세의 연금술을 의식하여 만든 이 용어는 문명비평가 리프킨(Jeremy Rifkin)에 의해 “생명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생명체를 개선하고 완전한 작용을 하도록 전혀 새로운 생명체를 조작하는 데 이용되는 기술”이라는 명쾌한 정의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미다스와 연금술이 추구하였던 금색 황금에 대한 환상을 넘어서 전열을 가다듬고 또다시 유전자를 조작하고 변형시켜 생산되는 녹색 황금(green gold)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고는 급기야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 등의 생물체에도 특허를 허용하게 되면서 생명과 물질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물질과 자연을 소유한 인류가 이제 생명 소유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생명은 공장화되고 생명과학적 연구가 주로 이윤적 동기에서 출발하기에 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생명관이 확립된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신성하고 존엄한 것이라는 개념은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에서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는 말이다. 오직 시장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하느님의 자리는 자유시장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지 오래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조차도 생명의 성서적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네 유전자가 어디 있느냐?

 

1997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한 ‘인간 유전체와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에서는 “인간 유전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자연 상태의 인간 유전체는 결코 영리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선포하고 있다.

 

유전체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도 “특히 생물학, 유전학, 의학 분야에서 인간 유전체에 대한 어떤 연구나 그 응용의 경우” 개인의 인간 존엄성을 훼손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

 

탈무드는 중용의 길을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씀으로 전하고 있다. 어떤 군대가 행진하고 있는데, 길의 오른쪽은 눈이 내려 얼음이 얼어있었고, 길의 왼쪽은 불바다였다. 이 군대가 오른쪽으로 가면 얼어 죽고, 왼쪽으로 가면 불에 타버릴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가운데 길은 따뜻함과 시원함이 적당히 조화된 길이라는 것이다.

 

생명자본주의로 욕망 채우기에 정신없이 돌진하던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가운데 길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찬성과 반대의 양극단적 논쟁보다는 신중한 대안 접근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 전진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할 것인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생명의 위기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열쇠는 끝없는 욕망을 억제하고 골고루 나누는 데 있다. 달콤한 사탕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 먹을 만큼만 먹고 쓸 만큼만 쓰는 원칙이 지켜진다면 죽어가던 생태계는 다시 살아날 것이고, 무한정 수명을 늘려보려는 과도한 욕심을 억제한다면 생명의 위기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라는 서릿발 같은 경고장을 마음에 담고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라는 팻말 앞에서 멈추어 서자. 자발적 절제와 나눔의 생활화는 바로 생명의 위기를 넘어서는 최고의 지혜가 될 것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라는 성명서(2007년)와 「생명운동지침서」(2010년)를 통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시도하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라는 대명제를 지켜내고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바탕으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와 적극적인 운동이 요청되고 있다.

 

아벨을 살해한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주무르며 탐욕에 혈안이 되어있는 현대인들에게 “네 유전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법하다. 이제 교회가 응답할 차례이다.

 

* 양재섭 - 대구대학교 대학원장이며 한국유전학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생명윤리학회 편집위원장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0월호, 양재섭]



93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